『민족21』10호 2002년 01월 01일
■"이제야 왔습니다. 용서하세요"
영원한 청년 장기수. 50년만에 불갑산 민간인 학살 현장 발굴한 김영승
1951년 2월 전남 함평군 불갑산에서 군경에 의한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당시 불갑산 빨치산 소년병이었던 김영승 선생. 그가 죄없이 죽은 민간인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50년만에 현장을 찾았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유골들. 그리고 진실, 사죄, 용서, 화해…
글 김지형 기자 cankjh@minjog21.com 사진 유수 기자 soo@minjog21.com
전남 함평군 불갑산의 한 능선자락. 수북히 쌓인 유골더미를 망연자실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는 한 사람이 있다. 당시 열 여섯 살의 소년병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김영승(65) 선생.
그의 고향은 함평군 묘량면 삼학리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불갑산 위에 있는 태청산으로 입산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빨치산 부대를 따라 불갑산으로 이동했다. 소년은 왜 빨치산이 되었을까?
★소년 빨치산 시절 목격한 불갑산 민간인 학살
어린 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존재는 다름 아닌 그의 형. 일제말 ‘유언비어’유포 혐의로 시국사범이 되어 감옥살이를 했던 형의 모습이 어린 동생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해방후 동네 야학에서 〈농민운동가〉 〈적기가〉 등을 배우면서 어린 김영승은 마을 소년단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그의 형은 민주청년동맹의 활동가였다. 형수 역시 마을 여성동맹위원장이었고 누나는 묘량면 여성동맹위원장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작은형은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희생됐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가 입산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처음에 빨치산들은 나를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았어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18살이 돼서야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연락병 노릇만 했지요.”
소년 연락병 시절 그가 겪은 대참화가 바로 불갑산 민간인 학살사건이었다. 인근 백운산, 지리산, 조개산, 목우산, 금성산 등지로 움직이며 빨치산 활동을 하던 그는 전쟁 이듬해인 1951년 초 이른바 ‘동계 대공세’를 맞았다. 불갑산 학살사건도 이때 빚어진 참극이다.
같은 해 4월 화학산 전투에서 30여 명의 동료 중 그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가슴아픈 기억도 있다. 그후 김영승 씨는 전남도당 직속부대였던 ‘전남부대’에 속했다. 그러다가 1954년 2월 전남 백운산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백운산은 전남도당, 전남사령부, 광양군당, 순천군당, 여수시당 등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던 전남 빨치산의 거점이었다. 국군 5사단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옥룡골 전투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인사불성인 채로 생포되고 말았던 것.
남원에 위치한 국군 사단 이동외과병원에서 중상자들이 수용되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얼마 후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대구교도소로 이송된 후 무기로 확정됐다. 나이관계로 김천소년형무소를 거쳐 안동, 대전, 목포교도소 등을 전전하다가 광주교도소에서 1974년 4월 28일로 예정된 만기 출소를 앞두고 있었다.
1974년이면 감옥 내에서 이른바 대대적인 ‘전향공작’이 시작될 때다. 아니나 다를까, 만기가 됐으나 내보내지 않고 오히려 반공법으로 또다시 2년을 선고받았다. 1976년 5월이 만기. 그런데 이번에는 사회안전법에 의해 ‘감호 처분’을 받게 됐다. 또다시 긴 감옥살이를 거친 끝에 1989년 9월 5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석방되었다.
1991년 늦게나마 ‘동지 부인’의 소개로 만난 지금의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김영승 선생. 지금은 《민족21》 독자사업부에서 ‘통일잡지’ 보급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50년 세월 동안 가슴속 깊이 맺힌 한이 있었다. 바로 산에 있던 시절 그가 목격하고 전해들었던 악몽같은 불갑산 민간인 학살사건.
“언젠가는 그때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의 유골을 확인해서 진실을 밝히고 그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지요.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는 나 역시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 길이 없습니다.”
2000년 9월 장기수 선생들의 북녘 송환 때, 그가 갈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문제였다. 고향 땅에서 빚어진 참극의 진실을 밝히고 원혼을 달래주지 못한 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출소 후 통일운동 하랴, 생계도 이어가랴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덧 10년 세월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러나 불갑산 학살사건을 한시도 잊은 적은 없었다. 그를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그때의 얘기를 하고 다녔다.
★“빨치산에게 밥 해줬다고 다 쥑여부렀어…”
2001년은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꼭 50년 되는 해. 그는 마침내 지난 11월 불갑산을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간직한 그때의 얘기를 수소문하던 중 용케도 당시 학살 현장을 목격한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두 사람은 눈물로 그때의 얘기를 나눴다.
그는 학살사건의 증언자를 찾자마자 남쪽에 살고 있는 장기수 모임인 ‘통일광장’ 동료들과 논의 끝에 살아 생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결심을 새롭게 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1월 26일. 그와 기자 일행은 광주행 기차를 탔다. 당시 학살사건 증언자를 만나기 위해 함평군 해보면 가정리(현 광암리)로 향했다. 가정리는 당시에 가정부락, 가쟁이마을 등으로 불리던 곳이다. 학살사건의 증인 최종남(77) 할아버지 집을 방문했다.
전쟁 이듬해 이 일대에서 끔찍한 학살사건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조기 엮듯이 엮어서 죽여 부렀어. 무조건 다 쏴 쥑여 부렀응께. 살아남은 사람들이 거의 없제.”
1951년 2월 20일 군인, 경찰들이 대대적으로 마을에 몰려들었다. 당시 인근에 포진하고 있던 빨치산의 규모는 약 30∼40명 정도. 김영승 선생에 의하면 “광주 20연대와 경찰 병력 해서 약 1500여 명 정도 동원됐다”고 한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빨치산은 후퇴하고 마을에 남은 건 민간인들과 인근 장성군 삼서·삼계면 등에서 피난 온 사람들뿐이었다.
해보면에서 이곳 가정부락과 함께 가장 큰 피해를 당한 마을이 산안부락(현 원산리), 오도치부락(현 대각리) 등 세 마을이다. 마을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최 옹에게 물었다.
“당시 가정부락은 한 30호 가량 됐제. 그라도 산안부락이 가장 컸응께 한 50호 가량은 됐을 것이구만. 오도치부락도 40∼50호는 족히 됐고.”
한 호당 평균 5∼6명이 거주했다면 세 마을을 합쳐 130여 호에 이른다고 할 때 최소한 6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최 옹에 의하면 인근 광동, 운암, 송산, 노정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 아무리 전쟁중이라지만 당시 군경은 왜 이토록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던 것일까? 김영승 선생의 얘기다.
“불갑산 줄기 위로는 불갑면, 아래로는 함평군입니다. 불갑산 줄기는 곧 빨치산의 루트였어요. 우리는 이곳을 불갑지구로 설정하고 지구당부와 사령부를 두었습니다. 불갑지구는 영광군, 함평군, 무안군을 포괄했고 목포시당 일부도 포함됐습니다. 불갑지구의 아래쪽은 야지이기 때문에 요충지라고 할 수 있어요. 전남 서북쪽의 보루인 셈입니다. 군경은 이곳을 장악해야 광주 등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곳을 사활적인 곳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최 옹의 증언은 좀더 구체적이다.
“빨치산에게 밥 해줬다고 다 쥑여부렀어.”
군경은 연 3∼4일간 ‘비로 쓸듯이’ 이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2월 20일과 21일에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다시 김영승 선생의 얘기.
“당시 불갑지구에 수천 명의 피난민이 바글거렸는데 이들 대부분이 학살당했습니다. 최소한 1500명 이상은 죽었다고 봅니다. 군경은 민간인과 빨치산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서 아예 몰살작전으로 나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민간인들을 죽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가정리를 포함해 인근 마을에서는 지금도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최 옹 역시 당시 피해자 가족이었다. 부모님을 비롯해 세 살 박이 동생과 조카들도 그때 희생됐다. 최 옹 자신은 다행히 굴을 파고 숨어 지냈던 탓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군경의 작전이 끝나고 마을로 나와보니 온통 시체 천지였다고 한다.
“산골짝, 밭둑이 시체로 빨래를 널어놓은 것 같았제. 길가에 괭이로 깔짝거려 다 묻었당께. 산사람(빨치산)들도 와서 묻어주고. 냄새가 얼마나 진동했는지….”
그해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얼었던 땅이 해동되면서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게 최 옹의 회고다. “산에서 땔나무 갈쿠리로 땅을 긁으면 뼈가 섞여 나올 정도였다”는 것.
★최소한 1500명, 이제는 풀어야…
최 옹을 따라나섰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학살의 현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집 맞은 편 야산을 막 오르기 시작할 무렵, 벌써 초입에 1∼2구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귀띔한다. 50년 전 이 길을 따라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줄줄이 엮여 죽음의 행진을 벌였을 것이 아닌가? 당시는 늦겨울, 오늘보다 더 추웠을 것이다. 산안부락 윗 능선을 타고 집단 암매장 된 장소를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40분 가량 걷자 길다란 능선에 이르렀다. 안내하던 최 옹이 발걸음을 멈췄다. 원산리와 가정리의 경계지점, 바로 이곳이다. 마을사람들은 ‘산안(리)뒷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빨치산들이 영마루를 지키기 위해 길게 전호를 파놓았는데, 군경이 오목한 이 전호속으로 민간인들을 몰아넣고 집단 학살했다는 것. 일단 파보기로 했다. 몇 군데 팔 곳을 정해 술을 따라 부은 후 일행은 묵념을 올렸다. 김영승 선생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빛을 볼 날이 멀었지만 여기 묻힌 영령들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용서하세요.”
낙엽을 걷어내고 10∼15㎝ 정도 흙을 파내자 쉽게 유골이 나오기 시작했다. 집단 학살한 후 흙조차 제대로 덮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해골을 비롯해 정강이뼈, 골반뼈, 척추뼈, 턱관절, 이빨 등이 그대로 나왔다. 여자 고무신, 거울, 돋보기, (은단)쇳곽, 고무줄 등도 보였다.
촘촘한 간격으로 뼈들이 무더기 채 발굴됐다. 뼈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마구 뒤섞여 있고 머리뼈와 정강이뼈가 붙어서 나오는 점 등을 볼 때 마구 뒤엉킨 시신들 위에 흙을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을 집단으로 몰아넣고 학살했다는 증거다.
유골들 사이에서 M1탄피들도 함께 나왔다. 위에서 아래를 향해 근접사격을 가했던 것으로 추측됐다. 파면 팔수록 유골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김영승 선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곁에서 물끄러미 발굴 현장을 지켜보던 최 옹이 연신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불쑥 한마디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여. 여기 있는 사람덜은…. 줄줄이 묶여 끌려와 당한 것이여. 동리 나이 든 사람들은 다 알 것이구먼.”
불과 1평도 못되는 곳에서 정강이뼈로 추정되는 것만 열 댓 개가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었단 말인가? 시신들이 묻혀있는 전호의 길이는 한 100m쯤 돼 보였다. 어림잡아 1m당 5명이 묻혔다고 치더라도 100m면 500명 정도가 이 곳에 묻혔다는 얘기가 된다.
일단 유골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제를 지냈다. 흩뿌리는 눈발 속에서 삽시간에 발굴한 유골더미를 아무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산까치들이 끼익끼익 구슬프게 울어댔다. 어느새 김영승 선생의 눈가에 이슬이 어려 있다. 반세기동안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응어리가 북받쳐 오르는 것일까.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출소한 지 12년만에 당시 격전지에서 아무 죄없이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한을 풀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는 생각입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본격적인 조사, 발굴, 증언작업이 이뤄져야 합니다.”
왜 이런 비극이 생겼다고 보십니까?
“모든 게 분단 때문에 생긴 일 아닙니까? 누가 누구를 벌주자는 게 아니라 일단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아직도 피해자 가족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후에는 용서하고 화해해야겠죠. 남과 북도 화해하자고 하지 않습니까?”
자꾸 산까치들이 울어댔다.
■"이제야 왔습니다. 용서하세요"
영원한 청년 장기수. 50년만에 불갑산 민간인 학살 현장 발굴한 김영승
1951년 2월 전남 함평군 불갑산에서 군경에 의한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당시 불갑산 빨치산 소년병이었던 김영승 선생. 그가 죄없이 죽은 민간인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50년만에 현장을 찾았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유골들. 그리고 진실, 사죄, 용서, 화해…
글 김지형 기자 cankjh@minjog21.com 사진 유수 기자 soo@minjog21.com
전남 함평군 불갑산의 한 능선자락. 수북히 쌓인 유골더미를 망연자실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는 한 사람이 있다. 당시 열 여섯 살의 소년병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김영승(65) 선생.
그의 고향은 함평군 묘량면 삼학리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불갑산 위에 있는 태청산으로 입산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빨치산 부대를 따라 불갑산으로 이동했다. 소년은 왜 빨치산이 되었을까?
★소년 빨치산 시절 목격한 불갑산 민간인 학살
어린 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존재는 다름 아닌 그의 형. 일제말 ‘유언비어’유포 혐의로 시국사범이 되어 감옥살이를 했던 형의 모습이 어린 동생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해방후 동네 야학에서 〈농민운동가〉 〈적기가〉 등을 배우면서 어린 김영승은 마을 소년단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그의 형은 민주청년동맹의 활동가였다. 형수 역시 마을 여성동맹위원장이었고 누나는 묘량면 여성동맹위원장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작은형은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희생됐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가 입산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처음에 빨치산들은 나를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았어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18살이 돼서야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연락병 노릇만 했지요.”
소년 연락병 시절 그가 겪은 대참화가 바로 불갑산 민간인 학살사건이었다. 인근 백운산, 지리산, 조개산, 목우산, 금성산 등지로 움직이며 빨치산 활동을 하던 그는 전쟁 이듬해인 1951년 초 이른바 ‘동계 대공세’를 맞았다. 불갑산 학살사건도 이때 빚어진 참극이다.
같은 해 4월 화학산 전투에서 30여 명의 동료 중 그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가슴아픈 기억도 있다. 그후 김영승 씨는 전남도당 직속부대였던 ‘전남부대’에 속했다. 그러다가 1954년 2월 전남 백운산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백운산은 전남도당, 전남사령부, 광양군당, 순천군당, 여수시당 등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던 전남 빨치산의 거점이었다. 국군 5사단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옥룡골 전투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인사불성인 채로 생포되고 말았던 것.
남원에 위치한 국군 사단 이동외과병원에서 중상자들이 수용되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얼마 후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대구교도소로 이송된 후 무기로 확정됐다. 나이관계로 김천소년형무소를 거쳐 안동, 대전, 목포교도소 등을 전전하다가 광주교도소에서 1974년 4월 28일로 예정된 만기 출소를 앞두고 있었다.
1974년이면 감옥 내에서 이른바 대대적인 ‘전향공작’이 시작될 때다. 아니나 다를까, 만기가 됐으나 내보내지 않고 오히려 반공법으로 또다시 2년을 선고받았다. 1976년 5월이 만기. 그런데 이번에는 사회안전법에 의해 ‘감호 처분’을 받게 됐다. 또다시 긴 감옥살이를 거친 끝에 1989년 9월 5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석방되었다.
1991년 늦게나마 ‘동지 부인’의 소개로 만난 지금의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김영승 선생. 지금은 《민족21》 독자사업부에서 ‘통일잡지’ 보급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50년 세월 동안 가슴속 깊이 맺힌 한이 있었다. 바로 산에 있던 시절 그가 목격하고 전해들었던 악몽같은 불갑산 민간인 학살사건.
“언젠가는 그때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의 유골을 확인해서 진실을 밝히고 그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지요.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는 나 역시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 길이 없습니다.”
2000년 9월 장기수 선생들의 북녘 송환 때, 그가 갈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문제였다. 고향 땅에서 빚어진 참극의 진실을 밝히고 원혼을 달래주지 못한 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출소 후 통일운동 하랴, 생계도 이어가랴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덧 10년 세월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러나 불갑산 학살사건을 한시도 잊은 적은 없었다. 그를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그때의 얘기를 하고 다녔다.
★“빨치산에게 밥 해줬다고 다 쥑여부렀어…”
2001년은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꼭 50년 되는 해. 그는 마침내 지난 11월 불갑산을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간직한 그때의 얘기를 수소문하던 중 용케도 당시 학살 현장을 목격한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두 사람은 눈물로 그때의 얘기를 나눴다.
그는 학살사건의 증언자를 찾자마자 남쪽에 살고 있는 장기수 모임인 ‘통일광장’ 동료들과 논의 끝에 살아 생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결심을 새롭게 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1월 26일. 그와 기자 일행은 광주행 기차를 탔다. 당시 학살사건 증언자를 만나기 위해 함평군 해보면 가정리(현 광암리)로 향했다. 가정리는 당시에 가정부락, 가쟁이마을 등으로 불리던 곳이다. 학살사건의 증인 최종남(77) 할아버지 집을 방문했다.
전쟁 이듬해 이 일대에서 끔찍한 학살사건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조기 엮듯이 엮어서 죽여 부렀어. 무조건 다 쏴 쥑여 부렀응께. 살아남은 사람들이 거의 없제.”
1951년 2월 20일 군인, 경찰들이 대대적으로 마을에 몰려들었다. 당시 인근에 포진하고 있던 빨치산의 규모는 약 30∼40명 정도. 김영승 선생에 의하면 “광주 20연대와 경찰 병력 해서 약 1500여 명 정도 동원됐다”고 한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빨치산은 후퇴하고 마을에 남은 건 민간인들과 인근 장성군 삼서·삼계면 등에서 피난 온 사람들뿐이었다.
해보면에서 이곳 가정부락과 함께 가장 큰 피해를 당한 마을이 산안부락(현 원산리), 오도치부락(현 대각리) 등 세 마을이다. 마을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최 옹에게 물었다.
“당시 가정부락은 한 30호 가량 됐제. 그라도 산안부락이 가장 컸응께 한 50호 가량은 됐을 것이구만. 오도치부락도 40∼50호는 족히 됐고.”
한 호당 평균 5∼6명이 거주했다면 세 마을을 합쳐 130여 호에 이른다고 할 때 최소한 6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최 옹에 의하면 인근 광동, 운암, 송산, 노정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 아무리 전쟁중이라지만 당시 군경은 왜 이토록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던 것일까? 김영승 선생의 얘기다.
“불갑산 줄기 위로는 불갑면, 아래로는 함평군입니다. 불갑산 줄기는 곧 빨치산의 루트였어요. 우리는 이곳을 불갑지구로 설정하고 지구당부와 사령부를 두었습니다. 불갑지구는 영광군, 함평군, 무안군을 포괄했고 목포시당 일부도 포함됐습니다. 불갑지구의 아래쪽은 야지이기 때문에 요충지라고 할 수 있어요. 전남 서북쪽의 보루인 셈입니다. 군경은 이곳을 장악해야 광주 등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곳을 사활적인 곳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최 옹의 증언은 좀더 구체적이다.
“빨치산에게 밥 해줬다고 다 쥑여부렀어.”
군경은 연 3∼4일간 ‘비로 쓸듯이’ 이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2월 20일과 21일에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다시 김영승 선생의 얘기.
“당시 불갑지구에 수천 명의 피난민이 바글거렸는데 이들 대부분이 학살당했습니다. 최소한 1500명 이상은 죽었다고 봅니다. 군경은 민간인과 빨치산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서 아예 몰살작전으로 나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민간인들을 죽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가정리를 포함해 인근 마을에서는 지금도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최 옹 역시 당시 피해자 가족이었다. 부모님을 비롯해 세 살 박이 동생과 조카들도 그때 희생됐다. 최 옹 자신은 다행히 굴을 파고 숨어 지냈던 탓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군경의 작전이 끝나고 마을로 나와보니 온통 시체 천지였다고 한다.
“산골짝, 밭둑이 시체로 빨래를 널어놓은 것 같았제. 길가에 괭이로 깔짝거려 다 묻었당께. 산사람(빨치산)들도 와서 묻어주고. 냄새가 얼마나 진동했는지….”
그해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얼었던 땅이 해동되면서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게 최 옹의 회고다. “산에서 땔나무 갈쿠리로 땅을 긁으면 뼈가 섞여 나올 정도였다”는 것.
★최소한 1500명, 이제는 풀어야…
최 옹을 따라나섰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학살의 현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집 맞은 편 야산을 막 오르기 시작할 무렵, 벌써 초입에 1∼2구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귀띔한다. 50년 전 이 길을 따라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줄줄이 엮여 죽음의 행진을 벌였을 것이 아닌가? 당시는 늦겨울, 오늘보다 더 추웠을 것이다. 산안부락 윗 능선을 타고 집단 암매장 된 장소를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40분 가량 걷자 길다란 능선에 이르렀다. 안내하던 최 옹이 발걸음을 멈췄다. 원산리와 가정리의 경계지점, 바로 이곳이다. 마을사람들은 ‘산안(리)뒷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빨치산들이 영마루를 지키기 위해 길게 전호를 파놓았는데, 군경이 오목한 이 전호속으로 민간인들을 몰아넣고 집단 학살했다는 것. 일단 파보기로 했다. 몇 군데 팔 곳을 정해 술을 따라 부은 후 일행은 묵념을 올렸다. 김영승 선생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빛을 볼 날이 멀었지만 여기 묻힌 영령들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용서하세요.”
낙엽을 걷어내고 10∼15㎝ 정도 흙을 파내자 쉽게 유골이 나오기 시작했다. 집단 학살한 후 흙조차 제대로 덮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해골을 비롯해 정강이뼈, 골반뼈, 척추뼈, 턱관절, 이빨 등이 그대로 나왔다. 여자 고무신, 거울, 돋보기, (은단)쇳곽, 고무줄 등도 보였다.
촘촘한 간격으로 뼈들이 무더기 채 발굴됐다. 뼈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마구 뒤섞여 있고 머리뼈와 정강이뼈가 붙어서 나오는 점 등을 볼 때 마구 뒤엉킨 시신들 위에 흙을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을 집단으로 몰아넣고 학살했다는 증거다.
유골들 사이에서 M1탄피들도 함께 나왔다. 위에서 아래를 향해 근접사격을 가했던 것으로 추측됐다. 파면 팔수록 유골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김영승 선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곁에서 물끄러미 발굴 현장을 지켜보던 최 옹이 연신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불쑥 한마디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여. 여기 있는 사람덜은…. 줄줄이 묶여 끌려와 당한 것이여. 동리 나이 든 사람들은 다 알 것이구먼.”
불과 1평도 못되는 곳에서 정강이뼈로 추정되는 것만 열 댓 개가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었단 말인가? 시신들이 묻혀있는 전호의 길이는 한 100m쯤 돼 보였다. 어림잡아 1m당 5명이 묻혔다고 치더라도 100m면 500명 정도가 이 곳에 묻혔다는 얘기가 된다.
일단 유골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제를 지냈다. 흩뿌리는 눈발 속에서 삽시간에 발굴한 유골더미를 아무말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산까치들이 끼익끼익 구슬프게 울어댔다. 어느새 김영승 선생의 눈가에 이슬이 어려 있다. 반세기동안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응어리가 북받쳐 오르는 것일까.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출소한 지 12년만에 당시 격전지에서 아무 죄없이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한을 풀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는 생각입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본격적인 조사, 발굴, 증언작업이 이뤄져야 합니다.”
왜 이런 비극이 생겼다고 보십니까?
“모든 게 분단 때문에 생긴 일 아닙니까? 누가 누구를 벌주자는 게 아니라 일단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아직도 피해자 가족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후에는 용서하고 화해해야겠죠. 남과 북도 화해하자고 하지 않습니까?”
자꾸 산까치들이 울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