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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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年が銃を持って山に上った理由 非転向長期囚金永昇先生が経験した解放と戦争」

2016年12月24日 | 韓国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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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입력 2009-04-28 수정 2009-05-19 김경환 기자
■소년이 총을 들고 산에 오른 까닭
 비전향 장기수 김영승 선생이 겪은 해방과 전쟁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은 남과 북이 나뉜 반쪽짜리 해방을 맞았다. 남에는 미군정이 들어섰고,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해있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을 앞세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좌우대립이 격하게 벌어졌다.
 어느 개인의 인생이든 그의 삶속에는 역사가 투영돼 있게 마련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을 겪었던 비전향장기수 김영승 선생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산에 올라 '빨치산'이 된 사연 속에 한국 근현대사의 한 단면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해방, 변한 것은 없었다
         【사진】'소년 빨치산'이라 불렸던 비전향 장기수 김영승 선생.
 오랜 일제강점기 시절은 나라 잃은 설움도 설움이었지만 대다수 민중에게는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기도 했다. 먹을 것 입을 것 하나 변변치 못한 채 일제에 수탈되는 것도 모자라 지주에게도 소작료를 바치고나면 그나마 가족들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웠다.
 해방이 되면 나라를 되찾았으니 무언가 바뀐게 있어야 할 터였지만 '소년' 김영승 선생의 눈에 비친 나라꼴은 일제강점기 그대로였다. 면서기들의 행패도 그대로였고, 순경들도 일제 순사들의 패악질 그대로였다.
 선생은 1935년 8월7일,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 신성부락에서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선생의 아버지는 홍경호라는 이웃집 지주의 머슴살이를 20여년 하면서 10여명에 달하는 가족을 부양했다. 머슴살이 댓가로 산골짝에 10여 마지기 농토를 소작할 수 있었다. 소작을 짓는다고 해도 남는 건 거의 없었다. 관에 '공출'을 바치고 지주에게는 '선자'(미리내는 선이자. 소작료)를 내고 나면 일년 먹을 식량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해가 짧은 겨울이면 아침밥을 해먹고 남은 식은밥을 솥에 넣고 물을 잔뜩 부은다음 끓여서 한그릇씩 먹고 견뎌야 했다.
 옷도 변변한 게 있을리 만무했다. 그당시 선생은 '광목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나마 베를 짜서 옷을 해입었지만 선생에게 새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위로 형님들이 입었던 옷을 줄여서 입어야 했다. 신발은 더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적까지도 고무신 한 번 신어본 적이 없었다. 짚신이나 '와라지'라고 부르던 짚으로 삼은 슬리퍼 비슷하게 생긴 신발을 신는게 전부였다.
 선생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집들이 수두룩했다.
 일제말기, 선생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에 들어가려면 입학시험을 치러야했다. 입학시험을 치는 날 일본인 시험관은 '요시'라며 잘쳤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세번 시험을 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보다못한 이웃이 "그러지 말고 선생한테 술 한 병하고 닭 한마리라도 갖다주면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큰형이 "그런일은 있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부터 초등학교를 다니겠다는 꿈은 접어야했다. 대신, 산골에 있던 서당을 다녔다. 머리가 좋았던 선생은 천자문을 비롯해서 한문을 익히고 한글도 배우게 됐다.
 "명심보감을 읽다가 해방을 맞았어. 서당 훈장이 그래도 민족적 양심을 가진 양반이었지. 그 양반 영향을 받고, 국문을 그때 다 뗄 수 있었어."

 해방되기 전 큰형이 '유언비어' 때문에 순사들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했다. 큰형이 '김일성 장군' 얘기를 퍼뜨린다고 누군가가 모함을 했다. 큰형은 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고서야 평양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 붙들려간 큰형이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목포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도 선생의 아버지, 어머니는 면회를 가려면 며칠동안 걸어야 했다. 끼니는 당연히 지나는 곳마다에서 얻어먹어야 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 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증오감은 자연스레 싹텄다.
 해방이 되자 그는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나이 때문에 선생은 2학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해방이 됐다고 해도 일제강점기때와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해방이 됐는데도 일제 때 있던 공출도 그대로 있었고, 면서기들의 행패나 순경들의 행패는 일제 때와 똑같았어. 없이 사는 사람들은 한없이 가난하고 끼니도 못 떼워서 사는 형편이었고. 우리 집보다 더 못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어."

 선생이 5학년이던 1948년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가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수 14연대 소속 일단의 군인들이 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총을 든 것이다. 국군과 경찰에 밀린 이들 중 30여명이 선생이 살던 마을 인근에 있던 불갑산에 근거지를 꾸리고 무장활동을 했다.
 유격대원들은 장성의 태청산과 불갑산을 왔다갔다하면서 작전을 폈다. 경찰은 유격대의 활동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밀재'에 출장소를 지었다. 그러자, 유격대는 밀재를 피해 선생이 살던 동네로 우회해서 움직였다. 경찰은 다시 '내촌'부락에 있는 야트막한 동산에 출장소를 또 지었다.
 1949년, 선생의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난하게 살던 막내 작은 아버지가 경찰이 몰던 짚차에 치어 허벅다리 뼈가 부서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당시 땅뙈기 하나 없던 작은 아버지는 도로가에 물내려가는 조그만 땅에 벼를 한포기씩 심어서 겨우 먹고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돌아오는 길에 굽은 길에서 짚차에 치인 것이다. 그 차에는 영광경찰서 보안과장이 타고 있었다. 잘못은 경찰이 했는데 죄는 옴팡 작은 아버지가 뒤집어썼다. 허벅다리 뼈가 부서지도록 다치고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되려 죄인처럼 끽소리 하지 못했다.
 "그때는 경찰 앞에서 꽥 소리도 못하던 시절이었어. 우리 형님이 경찰서에 갔는데 똑똑하게 답변도 못했다고. 내가 그 장면을 보고, '아 우리 집안에 사람이 없구나. 내가 커서라도 반드시 복수해야겠다'고 결심한 거지."

 작은 아버지 사건을 겪으면서 선생은 "앞으로 정치가나 혁명가가 돼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 앞장서자"는 결심을 굳혔다.
 "우리집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우리집보다 똥구녕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 많았을 뿐더러 '빽' 있는 사람들은 잘 살고 없는 사람들은 두들겨 맞고.. 이런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으면 나도 공부를 마음대로 할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경찰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우리 학교에 정태성이라는 담임선생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 담임이 지서 경찰과 술을 먹다가 의견이 삐걱댔어. 그러니까 경찰이 담임을 '빨갱이'로 몰아서 총살을 시킨 거야. 경찰은 그 시체를 도로가에 멍석 한 장 덮어놓고 전시했어. 오죽했으면 가족들이 6.25가 날 때까지 시체도 못찾아갔어."

 경찰이든 기동대든, 서북청년단이든 툭하면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죽였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빨갱이'로 몰리면 죽는 거지"
 그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승만 정권은 마을 청년들을 남녀 가릴 것없이 동원해 매일같이 '죽창훈련'을 시켰다. 전쟁연습에 동원한 것이다. 선생이 살던 마을에서도 17세부터 45세까지 처녀들과 부녀자들을 총동원해서 죽창훈련을 시켰다. 청년들도 '대한청년단'이라면서 훈련을 시켰다. 훈련을 감독한 경찰들은 면단위로 사람들을 모아 소대,중대,대대로 편성했다. 마침, 농번기였지만 젊은 사람은 모두 죽창훈련에 동원되다보니 정작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유격대의 이동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지은 '밀재'출장소에서 매일같이 순경들이 아침 9시면 버스를 타고 내려와서는 동네 옆 산삼부락에 있는 산삼초등학교(묘량면 분교)에서 훈련을 시켰다.
 그러다가 이 정보가 빨치산 유격대에 흘러들어갔다. 빨치산 유격대는 태청산에서 연정대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연암리에 있는 다리 근처에 매복하고 있다가 경찰들이 탄 버스를 습격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7명의 경찰 가운데 6명이 죽었다. 버스를 습격한 빨치산 유격대는 다시 불갑산으로 후퇴했다.
 얼마후 현장에 출동한 영광 경찰기동대가 유격대를 쫓아 불갑산으로 몰려갔다. 이게 화근이었다. 불갑산에서 숯돌을 캐던 선생의 아버지가 경찰기동대에 붙잡힌 것이다.
 "당시 우리 아버님이 없이 살다보니까 산에서 숯돌을 캤어. 숯돌을 캐서는 장날에 짊어지고 가서 팔고, 식량 한되라도 얻어서 식구들을 먹여살린 거야. 그런데, 경찰이 불갑산을 올라가다 보니까 굴 안에 어떤 영감이 한 명 있거든. 나오라고 해서는 '경찰기동대 버스 정보를 네가 제공한 것 아니냐'면서 안죽을만큼 두들겨팬 거야. 총소리가 날 때 나와서 동네로 돌아왔으면 됐는데 무서워서 동굴안에 있다가 잡힌 거지."

 아버지는 순식간에 '밀고자'가 되어 총살에 처해질 위기에 몰렸다. 경찰들이 아버지의 몸을 묶고 두 눈을 수건으로 가렸다. 총살을 하려던 찰나, 밀재출장소 주임이 나타났다. 밀재출장소 주임이 '누군지 얼굴이나 보게 수건을 내려보라'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밀재출장소를 지을 당시 부역에 동원됐던 아버지를 주임은 기억하고 있었다.
 "주임이 아버지를 아니까 '이 영감은 이럴 사람이 아니다. 내가 잘 안다'고 해서 살아난 거야. 아주 두드려 맞아서 담가에 싣고 연암리 도로가 주막에 모셔놓고 통지를 했어. 가서 보니까 초죽음이 됐어. 약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동네에 있는 똥간에 가서 '얼'을 푼다고 휘휘 저어서 똥물을 먹여서 겨우 살렸어."

 그해 가을부터는 선생이 다니던 삼학초등학교에 광주20연대가 주둔했다. 광주20연대는 매일같이 빨치산 토벌작전에 동원됐다. 그런데 그게 마을 사람들에게는 또하나의 고역이었다.
 "그때 당시 토벌대에 동원된 사람들 식사대접을 동네에 배당했어. 밥을 스무상 만들어라, 닭을 몇마리 잡아라, 돼지를 몇 마리 잡아라 그러면 자기네는 못먹고 굶더라도 그걸 만들어서 내다 바쳐야되는 거야."

 밤이 되면 빨치산 유격대원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밥을 안해 줄 수가 없어서 밥을 해주면 그걸 밀고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그 이튿날 마을로 달려온 경찰들은 온동네 사람들을 모두 들판에 내몰고는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실컷 두들겨 팬 다음엔 움직일 힘조차 없는 젊은이들을 따로 구르마에 싣고서 지서에 싣고 갔다. 끌려간 젊은이들은 2~3일이 지나서야 초죽음이 된 몰골로 돌아왔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선생의 이웃집에 살던 19살난 김영아라는 청년이 입산을 했다가 불갑산 용천사골에서 토벌대로부터 기습을 당하고 선생이 살던 동네로 두 명이 피신했다. 새벽녘 동네를 향해 경찰들의 기총소사가 계속됐다. 숨죽여 바짝 엎드려있다 아침이 되자 경찰과 군인들이 몰려왔다. 토벌대는 이웃집 지주 홍경호 댁 마당에 온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족별로 앉으라고 했다. 김영아라는 청년은 빨치산 생활로 햇빛을 제대로 못봐서 얼굴빛이 유난히 희었다. 그 청년은 차마 자기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하고 지주 홍경호 댁 머슴이라며 그쪽에 앉아있다가 빨치산이라는 사실을 들켜 체포됐다. 그뒤 그는 토벌대에 끌려다니면서 토벌작전의 '앞잡이'를 해야 했다. 그 청년은 어느날 밤 어디론가 도망을 쳤고, 그 이튿날 마을에 들이닥친 경찰기동대는 그 청년의 가족을 마당에 모아놓고 마구 두들겨팼다.
 그때즈음 경찰이 마을을 수색하다 선생의 집 헛간에 쌓인 재 속에서 수류탄 한 발과 단도를 발견했다. 김영아라는 청년과 함께 마을로 피신했던 빨치산 유격대원이 숨겨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선생의 아버지와 형들은 실컷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소년이 총을 들고 '빨치산'이 된 이유
 선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광중학교에 입학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6월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난 지 한 달이 채 못된 그해 7월22일, 담양에 주둔하던 경찰기동대가 인민군에 밀려 미처 후퇴를 못하고 선생의 고향 마을 인근 삼학출장소에 모여들었다. 인민군 척후병 두명이 경찰기동대에 투항을 요구했다 사살당했다. 그러자, 그날밤 인민군이 쏜 로켓포로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빨치산 유격대의 연락을 받고 미리 전투가 벌어질 것을 알고 있던 마을 주민들은 피난을 가기 위해 짐을 쌌다가 조명탄이 터지고 로켓포가 터지는 상황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숨어있었다.
 "우리는 전투 날 것을 알고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조명탄 터지고 그러니까 아궁이에 숨은 사람도 있고, 뒷산에 올라간 사람도 있고 그랬지. 그때 나는 작은형님이랑 불갑산 꼭대기까지 올라갔어. 날이 밝은 뒤에 보니까 마을 곳곳에서 연기가 나고 인민군대가 구르마에 대포를 끌고 진주해 있더라고."

 인민군이 진주한 뒤 두 달간의 상황은 이전과 크게 달랐다. 수시로 마을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가던 경찰기동대와 달리 인민군은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고 했다. '반동'들은 내무서에 구치했지만 개별적으로 사살하지 않았다.
 인민군은 심사를 통해 옛날부터 활동하던 사람들은 '구당원'으로, 새로운 사람들은 '신입당원'으로 받아들였다. 군과 면, 리 등 행정구역 단위로 당이 건설됐다. 선생은 면에서 소년단장을 맡았다. '민청'의 지시를 받던 소년단은 노래보급과 함께 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마을별로는 '치안대'가 조직됐다. 인민군에 패해 불갑산에 숨어있던 국군,경찰 패잔병들이 밤이 되면 무장을 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이들은 식량을 빼앗고는 마을주민들까지 죽이고는 했다. 치안대는 이들로 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평온했던 시절도 두어달에 그쳤다.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세는 뒤바뀌었다. 인민군은 후퇴를 해야 했다. 날마다 미군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폭격을 해댔다.
 "왜 입산을 했냐고? 소위 미군을 '침략군'이라고 했어. 그 사람들이 들어온 데마다 살인,방화,강간, 약탈 이 네가지는 안하는 데가 없었어. 그것(미군)만 걸렸다하면 여자들은 씨도 안남았어. 그렇게 집단학살도 일어나고, 부락에 있다간 다 죽을판이니 동네사람들이 다 입산한 거지."

 피난민들이 몰려든 태청산은 장성군당, 무안군당, 면당부(면단위 당조직) 뿐만 아니라 피난민으로 바글거렸다. 매일같이 전투가 벌어졌다. 지형상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면당부에선 입산한 피난민들에게 '산에 있으면 죽는다, 부락으로 내려가라'고 설득했다. 그때 선생은 산에 남았다.
 "우리 집과 동네사람들도 부락에 내려갔는데 나는 남아 있었어. 그러니까 면당 위원장이 나보고 '나이가 어리니까 학교 다니는 것이 어떠냐'고 했어. 나는 '안내려간다, 동지들하고 죽으면 죽고 같이 싸우겠다'고 했어."

 그뒤 선생은 '소년 빨치산'이 됐다.
 1954년 2월 선생은 전투중 세 발의 총알을 맞고 견갑골이 부러졌다. 붙잡힌 빨치산들은 남원 뒷산을 깎아 만든 수용소에 수용됐다. 2백여명이 되는 빨치산들이 거기에 포로로 있었다.
 재판에 회부된 선생은 빨치산 3중대 부중대장을 지냈던 김원섭이라는 이의 '밀고' 때문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54년 9월10일 선생은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됐다. 이때 사형이 확정된 12명은 54년 12월24일에 총살을 당했다.
 감옥살이도 투쟁의 연속이었다. 1973년 4월28일 선생은 만기출소가 예정돼 있었으나 전향을 안했다는 이유로 깡패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그 사건으로 오히려 그에게 '반공법'이 적용됐고, 다시 2년을 더 옥살이를 해야했다. 다시 만기가 되자 이번엔 '사회안전법'으로 감호처분을 받고 청주보안감호소로 끌려갔다. 그와 함께 감호처분을 받은 이가 150여명 가량 됐다. 그중 10여명은 옥안에서 숨졌다. 1988년 올림픽이 치러지던 해부터 노인과 환자들이 한두명씩 풀려났다. 서준식씨가 청주보안감호소를 나와 세상에 '장기수'들의 존재를 알린 것도 이때쯤이다. 여소야대 정국을 이룬 1989년에야 사회안전법이 철폐되면서 선생은 감옥 밖의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감옥에서 36년 살았는데, 어렸을 때 생각이나 지금 생각이나 본질적으로 변한게 하나도 없어. 지금도 어릴 때 생각이 옳다고 봐. 거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

 선생은 '민족적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옳은 것이기 때문에 ‘민족적 관점’으로 살아야 돼. 민족적 관점을 갖고 6.15선언과 10.4선언에 입각해서 남과 북이 하나돼서 통일 이루는 방향으로 가야 된다는게 소신이야. 이 땅의 외세를 철저히 배격하고, '우리민족끼리'라는 이념을 갖고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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