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

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20

2009年05月31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金大中大統領に 3】

■한국정부에로의 부탁
 조선촌의 규모는 매우 크며 하나의 시민단체나 하나의 회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조선촌의 역사적 성립과정을 생각하니 하나의 민간회사가 관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생각됩니다.
 근본적으로는 조선촌의 희생자들은 일본의 식민지로 된 조선민족의 수난의 역사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조선촌의 유골을 발굴하고 사인을 특정하고 한분이라도 그 유골의 신원을 밝히고 아들 혹은 남편 혹은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가죽밑에 유골을 돌려 보내는 일은 한국정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조선촌에서의 학살에 대하여 첫째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대는 일본정부입니다. 그러나 일본정부에 그것을 요구하는 동안에 유골은 헐어 져 갈 것입니다. 해남도는 1년을 통해서 아주 무더운 곳입니다. 전문가에 의하면 발굴되고 공기에 닿게 된 유골이나 부장품은 금방 붕괴해 간다고 합니다.
 저희들은 한국정부에 대하여 우선 다음의 두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1,조선촌에 묻혀 있는 분들의 유골을 사인을 특정하기 위하여 해부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부는 무리라 해도 몇구라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2,조선촌의 유골의 처우를 국가 프로젝트로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한국정부가 나서 주신다면 저희 紀州鑛山의 진실을 밝히는 회에서는 협력을 아끼지 않씁니다.

 일본인은 자기들의 침략의 역사를 바로 직시하려 하지 않으며 또 이전에 직접적으로 가해행위에 관여하였던 세대의 거의는 그것을 숨긴 채 죽어 가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우경적인 정치・사회상황을 생각하면 일본 침략사를 총체로서 밝히는 것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 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들은 1945년 당시의 주소를 가지고 紀州鑛山에로 강제연행된 분들을 찾아서 한국으로 몇차례 갔습니다. 그 때 지방의 동사무소나 면사무소나 시청의 민원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 이 편지를 직접 읽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청와대 민원계에 보내 볼렵니다.
 저희 모임 활동에 대해서도 보고한 것은 저희 모임의 취지를 이해해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저희 모임은 회원의 회비로 운영되며 회원에는 일본인도 재일한국인도 있습니다.
 저희들은 5명으로 제4회해남도현지조사로 3월20일부터 4월5일까지 해남도로 방금 갔다 왔습니다. 발굴된 유골중 몇구는 신원도 밝혀 지지 않는 채 유리케이스에다 넣어 져서 찾아 오는 사람들 눈에 보이게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非業하게 죽임을 당한 그들이 원한 일일 수가 없습니다.
 이상 관략하게 조선촌에 대하여 현 단계의 조사・언구 결과와 현재 상황을 적으면서 저희들의 부탁을 썼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해 주셨으면 해서 KBS와MBC의 다큐멘터리, 저희 해남도 조사 보고・논문등을 같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바쁘시겠지만 검토해 주셔서 답신을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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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9

2009年05月31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金大中大統領に 2】

 현재 南丁村에는 허다한 유골이 묻히고 있습니다. 이 유골들은 “朝鮮報國隊” 로서 해남도로 끌려 갔던 조선인이라고 생각해서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인근 黎族주민에 의하여 조선촌이라고 불리어 지고 있습니다.
 해남도로 끌려 갔고 아주 다행히 귀향할 수 있어서 가석방되었던 217명의 서류(조선총독부행형부작성)는 서울에 있는 한국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朝鮮報國隊”였던 몇분에게서 한국에서 만나뵙고 그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남도로 간다는 것은 미리 알려 주지 않았었고 형기가 단축된다고만 알아서 어딘가에 떠났답니다.
 그러나 해남도로 연행된 옥중자 명단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조선촌에 묻혀 있는 분들의 성함을 한명도 밝혀 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이 조선촌에 대하여 조선일보나 불교신문등에서도 보도되었고 데레비국2사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습니다(KBS제작”해남도에 묻힌 조선의 혼”1998년8월31일방영. MBC제작”하이난島의 대학살”2001년3월1일방영).
 저희 紀州鑛山의 진실을 밝히는 회에서는 이 숨겨 진 해남도에서의 잔혹한 조선인학살에 대하여 회원이 서울이나 중국上海에서 열린 심포지엄이나 연구논문에서 보고해 왔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김대중대통령께 직접 편지를 드리는 것은 이 조선촌의 유골에 대하여 어떻게 해 주실 수 없을까 해서입니다.
 조선촌에서는 1998년 7월에 KBS가 다큐멘터리제작시 몇구의 유골을 발굴했고 그 후 다시 묻었습니다. 2001년 1월에는 해남도에서 농업경영을 하는 한국인의 信宇회사가 대규모로 발굴했고 1월 12일~2월 11일까지 100구를 넘을 유골을 발굴하였으며 유골과 함께 藥莢, 일본군의 것과 양식이 흡사한 “군대수첩”, 단추, 옷조각, 금니등등이 나왔습니다. 현재 조선촌은 信宇회사가 관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紀州鑛山의 진실을 밝히는 회에서는 해남도나 조선촌에 대하여 조사・연구를 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KBS와 MBC의 협력의뢰에는 응하고 KBS때는 일본 취재코듀네이터를 하였고 MBC때는 해남도취재시 동행하였으나 발굴작업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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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8

2009年05月30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2002年4月17日に、金大中大統領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送った要請文を3回にわけて掲載します。

【金大中大統領に 1】

김대중대통령앞

저희들은 일본에 있어서 1945년 8월이전 일본에 의한 조선에서 부터 의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역사를 조사・연구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 각지에서 조선에서 부터 강제연행된 분들이 광산, 도로・댐・항만등의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역사에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언급되어 있다해도 사실대로 기술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紀州鑛山에 대하여
 三重県南牟婁郡紀和町에 있는 紀州鑛山(石原産業株式會社經營、銅鑛山)에는 1940년대 초부터 1000명을 넘는 조선인이 조선에서 부터 강제연행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1997년에 紀州鑛山의 진실을 밝히는 회를 만들어서 紀州鑛山에서의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에 대하여 조사해 왔습니다.
 1946년에 紀州鑛山 사업소가 작성한 조선인명단을 입수하여 거기에 기재되어 있는 주소를 실마리로 1996년 10월, 동12월, 1997년 5월, 1998년 8월에 한국 강원도와 경상북도를 찾아 가서 紀州鑛山 에 강제연행되었다가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분들을 만나 뵙고 그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中國海南島의 “朝鮮村”에 대하여
紀州鑛山의 진실을 밝히는 회에서는 나아가서 石原産業의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하여 조사를 계속하여 石原産業이 중국 해남도에서도 1939년 2월 10일의 일본군 해남도 점령 직후부터 조선인을 강제노동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石原産業이 경영하던 田獨광산에서의 강제노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해남도 점령 시기(1939년 2월 10일~1945년 일본 패전시)에 일본군이나 일본기업에 의하여 田獨광산이외에도 해남도 각지의 군사시설건설, 항만건설, 철도공사, 광산등에 조선인뿐만 아니라 해남도 주민(선주민족인 黎族・苗族, 漢族, 回族), 중국본토의 廣州, 汕頭, 潮州, 香港등지에서 연행된 漢族 또는 영국군이나 호주군의 전쟁포로, 대만인을이 많이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4回(1998年6月~7月、2000年3月~4月、2001年1月、2000年3月~4月)에 걸친 해남도에서의 조사와, 한국인의 증언, 한국과 일본에서의 문서자료 조사등에 의하여 현제까지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 졌습니다.
 1, 조선인과 대만인은 조선과 대만의 형무소에서부터 강제연행된 옥중자들이었다. 그들은 “朝鮮報國隊” “臺灣報國隊”라고 이름지워 졌다.
 2,“朝鮮報國隊”는 “南方派遣報國隊” 라고도 불리어 지며 일본군의 명령, 관리하에서 제1차부터 제8차까지 편성되었다. 제1차“朝鮮報國隊” 의 해남도 출발은 1943년 3월 30일이었다( “臺灣報國隊”에 대하여도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자세히는 밝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3,“朝鮮報國隊”가 연행된 곳은 해남도만이었다.
 4, 해남도에서는 三亞飛行場, 黃流飛行場, 三才鎭后石村飛行場, 英州鎭大坡村飛行場, 八所港灣工事, 三亞―八所간 철도공사(이상 일본군 시설), 田獨鐵鑛山(石原産業經營), 石碌鐵鑛山(日本窒素經營), 관련되는 토목공사(西松建設)등에서 강제노동을 시켜 졌다.
 5, 일본의 패전전후경까지 살아 남아 있던 三亞市에서 멀지않은 데에 있던 “朝鮮報國隊”는 三亞市교외 南丁村에 모아 졌다.
 6, 南丁村에 모아 진 “朝鮮報國隊”는 전원이 일본군에 의하여 학살되었다. 그 수는 1000명이상이라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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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7

2009年05月29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朝鮮村」地域の「開発」がすすみ、「朝鮮村」内の朝鮮人が埋められている場所が破壊されるおそれが生じているため、いつまでも放置しておくことができないので、やむをえず、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地権者の同意を得て、独自で、2006年5月に、「朝鮮村」で「試掘」をおこないました。
 それまで、「朝鮮村」での「発掘」は、1998年7月と2001年1月におこなわれていました。
 1998年7月の「発掘」は、韓国KBSのドキュメンタリー『해남도에 묻힌 조선혼(海南島に埋められた朝鮮の魂)』(金五重監督、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協力)の制作スタッフが、韓国忠北大学校の体質人類学者である朴善周さんとともにおこなった小規模なもので、「発掘」された遺骨は、埋め戻されました。報告書は作成されませんでした。
 2001年1月の「発掘」は、韓国MBCのドキュメンタリー制作スタッフが、海南島に居住し農場経営をしていた韓国人地権者とともにおこないました。このときの「発掘」も、厳密に科学的にはおこなわれませんでした。韓国忠北大学校遺骸発掘センターの研究員2人と学生1人が参加し、「鑑定」などをおこない、おおまかな報告書(『中国海南島朝鮮村発掘結果報告』本文5頁、図1頁、写真17頁)は作成されましたが、一人ひとりの個別の埋葬状態は記録されませんでした。
 2000年末に、韓国MBC から協力を依頼されたとき、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取材内容と方法にかかわって、ドキュメンタリー制作のために「発掘」をするのではないかと疑問を呈するとともに、遺骨を遺族に返す努力をすることを求めました。
 それたいし、韓国MBC から、韓国人実業家はそのことに努力してきており、実現できるように協力することが最善であると考えるという返事がきました。
 わたしたちは海南島に行き、取材に協力しましたが、「発掘」のありかた、遺骨の扱いについて、わたしたちの意見は反映されませんでした。
 このとき、虐殺され埋められていた朝鮮人のうち100人あまりの人たちが「発掘」され、遺骨が、海南島の陽に照らされ、風にさらされました。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強く反対したにもかかわらず、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会員が海南島を去ったあと、実際には、遺族をさがす努力がまったくなされないまま、遺骨のほとんどは、韓国人実業家によって、石臼で砕かれてしまいました。砕かれた遺骨は、100個あまりの小さな壷に分けられ、虐殺現場近くのコンクリート作りの「納骨堂」に並べられました。「発掘」もその後の遺骨の扱いも、慎重にはなされませんでした。
 弾痕と思われる穴があいていた頭骸骨も、ふたつの頭蓋骨がくっついた遺骨も、手足や体が不自然に曲がった遺骨も砕かれてしまいました。死者の名がわかり、遺骨が家族のもとに帰る日がはるかに遠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事実を明らかにする科学的鑑定が、ほとんど不可能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
 5体の遺骨だけが砕かれずに、コーティングされ、ガラスケースに入れられ、「遺品」(金歯、衣服の一部、白いボタン、携帯用針入れと針など)や、いっしょに出てきた「軍隊手帳」、薬莢、らせん状のはりがね、くぎ、鉄製の輪などとともに、レンガ作りの建物のなかで、「保存処理」されることなく、「展示」されました。
 この遺骨も「遺品」も、このままでは、気温が高く湿気のおおい海南島では、崩れ去っていきます。
 埋葬状態を分析しつつ慎重に段階を追って綿密に記録をとりながら「発掘」し、遺骨・遺品・副葬品を厳密に法医学鑑定すれば、死因を特定でき拷問や暴行の実態を知りえたかもしれません。犠牲者の名を知る手がかりも発見できたかもしれません。
 2001年3月1日に、韓国MBC制作『하이난섬의 大虐殺(海南島の大虐殺)』が放映されました。
 2001年10月24日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佐藤正人が、「日本占領下の海南島における朝鮮人虐殺  アジア民衆共同の東アジア近現代史認識をめざして」という報告を、上海で開かれた第10次 国際教科書学術会議(『亜細亜諸国の歴史教科書に示された抗日運動』)でおこないました。
 その後、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科学的な「発掘」を実現するために、それを共同で実現しようとする組織や個人との出会いを韓国と日本で求める活動をすすめるとともに、2002年4月17日に、金大中大統領に、「朝鮮村」に埋められている朝鮮人の死因を解明してほしいと文書で要請しました。
 それにたいして、2002年6月20日付けで韓国外交通商部東北亜1課外務官から返信があ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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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6

2009年05月28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昨年(2008年)10月末、佐藤正人が「朝鮮村」を訪問したとき、朝鮮人が埋められていると思われる場所の一部分が整地され、何棟もの大きなプレハブの建物が建てられ、その前に何台もの大型ブルトーザーやトラックが並んでいました。
 そこは、「朝鮮村」を横断する海南島一周高速道路工事の資材(とくに橋板)製作場として使われており、建物は、工事事務所と労働者の宿舎と食堂でした。近くに、おおきな生コンクリート生成貯蔵塔が2本立っていました。
 工事事務所からでてきた人に聞くと、工事は8月20日に始まったばかりで、完成予定は2010年4月30日だとのことでした。業主は三亜市交通局、施工者は徐州市公路工程総公司でした。
 2001年1月に韓国MBCらが「発掘」した地域と2006年5月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試掘」しようとした地点と「収蔵庫」と「追悼碑」は、そのままでしたが、レンガ造りの塀の中央部の門は壊され、そこから整地された土地まで幅2メートルほどの道路がつくられていました。この道路の下の遺骨は粉砕されてしまったと思われます。
 「納骨堂」は、工事現場の建物を仕切る壁と南丁小学校の壁の間にはさまれて残っていました。
 朝鮮人が埋められている場所と思われる広場の一角にあるレンガの塀に沿っている道が、工事車によって削りとられていました。その近くの土中に骨が露出していました(その写真は、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会報』第2号に掲載してあ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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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5

2009年05月27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2006年4月の『朝日新聞』にも、
   「韓国政府の「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も朝鮮人が殺害された可能性があるとみて、昨年夏に担当者を海南島に派遣した」
と報道されていましたが、真相糾明委員会の担当調査官は、海南島に何回か行ったようです。
 しかし、真相糾明委員会は、わたしたちに具体的な報告をすることも、なんらかの報告を公表することもありませんでした。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わたしたちの海南島での「現地調査」の内容を真相糾明委員会に伝えていましたが。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が韓国国家機構として設置されたのは、2004年11月10日でしたが、その前後、2004年10月1日から10日まで、ソウルの西大門刑務所歴史館で、10月15日から11月21日まで、天安の独立紀念館で、特別展『海南島で日本はなにをしたのか 侵略・虐殺・掠奪・性奴隷化』(主催:民族問題研究所、独立紀念館。後援: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開かれました。
 この特別展の構成は、つぎのとおりでした(詳細は、このブログの2006年10月07日~10月10日の書きこみをみてください)。
    Ⅰ、総論:海南島で日本はなにをしたのか
    Ⅱ、軍事侵略、抗日闘争
    Ⅲ、経済侵略:土地略奪・資源略奪・労働強制
    Ⅳ、「朝鮮村」虐殺
    Ⅴ、海南島における日本軍隊性奴隷制
    Ⅵ、侵略犯罪に時効はない!
 特別展の会場では、常時、ドキュメンタリー『日本が占領した海南島で 60年まえは昨日のこ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制作)がテレビモニターで上映されました。
 その後、2004年11月末~12月初めに、独立紀念館の韓国独立運動史研究所のチョポムネ研究員と独立紀念館のイムコンジェ学芸員が海南島に行って調査し、同研究所は、2005年4月に『일제 강점하 국외 한인 피해 실태조사보고서Ⅰ 중국 해남도지역』(『日帝強占下国外韓人被害実態調査報告書Ⅰ 中国海南島地域』)を発行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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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4

2009年05月26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朝鮮村」のなかの朝鮮人犠牲者が埋められている地域が「開発」=破壊されるおそれが生じているため、いつまでも放置しておくことができないので、やむをえず、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地権者の了解をえて、独自で、2006年5月に、「試掘」をおこないました。
 そのすこし前、関連する記事が、『朝日新聞』の各地版に掲載されました。版によって記事がすこし異なっていましたが、西部版(2006年4月4日夕刊)の記事は、ほぼ、つぎのとおりでした(写真とそのキャプションは除きます)。

■海南島 無念の骨探る
 戦時中 鉱山強制動員の朝鮮人
 日本の市民団体 試掘へ

 戦時中に日本が占領した中国・海南島で数百人の朝鮮人が殺害された疑いがあるとして、関西や北海道の民間研究者や大学教授らでつくる「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遺体が埋められたとされる場所を年内に試掘する。
 法医学者や考古学者の協力も得て、遺骨が朝鮮人のものかどうかを調べる。6日までメンバーが現地入りして、準備を進めている。(佐藤純)

 韓国政府の「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も朝鮮人が殺害された可能性があるとみて、昨年夏に担当者を海南島に派遣した。同会は試掘の結果を踏まえ、韓国政府に本格的な発掘を働きかける方針だ。
 防衛庁防衛研究所の「戦史叢書」によると、旧日本軍は1939年2月に海南島を占領し、軍政を敷いた。南進の足場とする目的のほか、島内の天然資源も狙った。石原産業や日本窒素肥料(現チッソ)などが鉱山開発に進出したという。
 朝鮮総督府法務局内に置かれた財団法人治刑協会が刑務所の運営状況などを伝えた雑誌「治刑」は、海軍の要請を受けた総督府が43年、朝鮮半島の受刑者らを「南方派遣報国隊」として海南島に派遣し、土木工事や採掘をさせた、と伝える。
 同会は石原産業が経営した三重県の紀州鉱山に動員された朝鮮人の被害を調べたのを機に、海南島にも調査を広げた。海南島から受刑者200余人が生還した記録を韓国で見つけたが、残りの人たちの消息はつかめていない。
 会の協力で韓国の放送局は98、01の両年に計100体ほどの遺骨を発掘。頭部がない遺骨や穴が開いた頭蓋骨(ずがいこつ)も見つかったが、身元の特定には至らなかった。
 遺体が埋められたとされる場所の付近で開発計画が持ち上がっていることから、現場の情況が変わる前に改めて試掘することに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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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3

2009年05月25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わたしたち(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会員)が、はじめて「朝鮮村」を訪れたのは、1998年6月でした。
 その後、なんどとなく「朝鮮村」やその近くの村でたくさんの人に、話を聞かせてもらいましたが、「朝鮮報国隊」についてまだまだわからないことが、たくさんあります。
 「朝鮮報国隊」に入れられ海南島に送られ、再び故郷に戻ることのできなかった人は、日本内務省文書、朝鮮総督府文書、旧日本軍文書(元海南警備府司令長官伍賀啓次郎の「帰還報告書」ほか)などによっても少なくても千数百人だと思われますが、その人たちの海南島での軌跡は、ほとんどわかっていません。
 わたしたちは、これまで、海南島で、「朝鮮村」とその周辺の村以外では、三亜市の回新村や六郷村や田独村、陵水黎族自治県の后石村や新村や英州、保亭黎族苗族自治県の南林、昌江黎族自治県の石碌、東方市の感恩などで、「朝鮮報国隊」を見たという人たちから話を聞かせてもらってきました。
 2008年春、わたしたちは、1998年いらい15回目の海南島「現地調査」のときに、「朝鮮報国隊」の軌跡について、東方市の八所村と三亜市の林家村で、新たな証言を聞かせてもらうことができました。
 朝鮮各地の刑務所から朝鮮人を海南島に強制連行した朝鮮総督府行刑官であった日本人刑務官が、一人だけ、「朝鮮報国隊」について述べた文章を残していますが、海南島で「朝鮮報国隊」の人びとを虐殺したと思われる旧日本兵は、わたしたちに証言を拒否し続けています。
 「朝鮮報国隊」に直接関係のなかった旧日本兵の一人、三亜飛行場を基地とする日本海軍第254航空隊に1943年12月からいた田川定男氏(1919年生)は、2000年10月に出版した『激流に生きる』(文芸社)のなかで、つぎのように述べています。
    “1944年11月から、三亜飛行場北方4、5キロの西森、さらに奥地の大恩崗、阜烟梅などに、兵舎・士官室などを建設し、発電所・工作機械を移設し、地下ケーブル敷設のための溝を掘り、飛行機誘導路を建設し、いくつもの掩体壕をつくった”、
    “われわれの電信室も掩体壕で被われることになり、多くの囚人が連れて来られ、数人の看守が見張って作業は進められた。”

 「多くの囚人」とは、「朝鮮報国隊」の人びとのことだと思われたので、わたしたちは、2005年4月に、田川定男氏に自宅で話を聞かせてもらいました。
 そのとき、田川定男氏は、自分が見た「囚人」は日本人でなかったと思われるが朝鮮人かどうかははっきりしない、着ていたのは青い服だったと話しました。
 ‘西森’、‘大恩崗’、‘阜烟梅’は、現在の海南島地図には出ていないので、当時の日本軍三亜飛行場の地図(防衛研究所図書館蔵)のコピーを示して位置を聞きましたが、確認できませんでした。
 わたしたちは、その後も、‘西森’、‘大恩崗’、‘阜烟梅’と思われる地域になんども行って見ましたが、はっきりしませんでした、
 2008年4月14日に、わたしたちは、西森’、‘大恩崗’、‘阜烟梅’の位置を知ろうとして、三亜市郊外の林家村(三亜市鳳凰鎮妙林管区林家村)を訪ねました。
 林家村は、六郷村や妙山村のすぐ近くの村です(六郷村については写真集『日本の海南島侵略と抗日反日闘争』74頁を、妙山村については同書27頁を見てください。妙山村のことは、2007年1月1日、2日、3日にこのブログにも書きこんであります)。
 旧日本軍文書『海南警備府戦時日誌』には、大恩峝に守備隊本部があ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写真集『日本の海南島侵略と抗日反日闘争』4頁に掲載してある海南警備府の「陸上部隊兵力配備要図」に、妙山の西に大恩峝という地名が書かれています。

 林家村で、邢師全さん(農暦1925年7月21日生邢師全さん)とその弟の邢師光さん(農暦1928年5月26日生)から話を聞かせてもらうことができました。
 邢師全さんは、こう話しました。
    「日本軍が海南島に上陸したのは、農暦1938年12月26日だった。
     わたしの一家はいまの三亜の中心に近い三亜街に住んでいた。
     日本軍が来て、ここに飛行場をつくるので移れと言われて、むりやりここに移住させられた。日本軍は、しっかりした家には100元から200元ほど払ったが、わらの家の人にはなにも払わなかった。
     密林のようだったここに移ってきてとても苦労した。
     わたしは、日本軍にいろいろな仕事をさせられた。
     村の「保長」に日本軍で働けと言われ強制的に働かされた。
     田独鉄山で働かされたこともある。
     日本軍のトラックに乗せられて連れていかれた。
     1か月ほど働いた。草の家で寝た。
     おかずは少なかったが飯は食べほうだいだったので、腹をすかせることはあまりなかった。
     田独鉄山でインド人やイギリス人を見たことがある。インド人は監督をしていた。
     朝鮮人も見たことがある。朝鮮人が着ていた服の色は青かった。
     服の後ろに“朝鮮報国隊”と書いてあった。300人くらいいた。
     朝鮮人は荔枝溝にもいた。軍事工事をさせられていた。
     朝鮮人には自由がなかった。休憩がおわったとき日本人が笛をならして、すぐに集まらないと、殴り殺した。
     わたしは、飛行場でも働かされた。木を切った。道路工事をさせられたこともある。
     土を運んだり、地面を掘ったりした。
     妙山で日本軍が12人の人を竹でつないで首を切って殺して井戸に捨てるのを見たことがある。
     日本軍が負けたとき、アメリカ軍が飛行機でやってきた。
     三亜の人は、アメリカ軍を歓迎し、牛や鶏を贈った。国民党が来たのはその後だ。
     日本軍がいなくなって、とても幸せになった。
     しかし、日本軍が来るまえに住んでいた三亜街は飛行場になっていたので、戻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回族の人たちは、飛行場の近くに戻った。
     日本軍はにくい」。

邢師光さんは、
    「朝鮮人を飛行場で見たことがある。
     朝鮮人は、飛行機を入れるところをつくっていた。
     着ていた服の色は青かった。麦わら帽子をかぶっていた。
     わたしも飛行場で働いたが、子どもだったので、1角しかもらえなかった。土を運んだ。
     日本兵は子どもをかわいがった」
と話しました。

 4月14日に邢師全さんと邢師光さんから話を聞かせてもらうとき、わたしたちは、こちらからは一言も「朝鮮報国隊」という言葉を話しませんでした。それなのに「朝鮮報国隊」のことを覚えていて証言するのは、「朝鮮報国隊」が邢師全さんにとって印象的なことだったからだと思いました。
 そのあと、三亜を離れてから、邢師全さんと邢師光さんが証言している映像を見ると、「朝鮮報国隊」という文字が服に書いてあったという証言をするとき、邢師全さんは軽く左手を右肩に置いていたことに気づきました。
 さらにくわしく話を聞かせてもらうために、瓊中黎族苗族自治県吊羅山郷、陵水黎族自治県本号鎮三十笠村、五指山市水満郷などを経由して、三亜市林家村を4月23日と24日に再訪しました。
 4月24日に、邢師全さんは、つぎのように話しました。
    「飛行場の工事で働かされているとき、朝鮮人を見た。
     荔枝溝でも見た。
     朝鮮人は、青い服を着ていた。
     腰を帯でしばっていたが、その帯の色も青かった。
     ズボンも青色だった。
     背中に、朝鮮報国隊と書いた白い布が縫い付けてあった。それで、朝鮮人だとわかった。
     インド人も見た。頭に布を巻いていた。
     日本軍は、広州人や汕頭人も働かせていた。
     病気になっても治療しなかった。たくさん死んだ。
     腹が痛いので働けないといっている朝鮮人を、日本兵が刺し殺したのを見たことがある。
     日本兵は、仕事が遅いとか、歩き方がのろいといって、働いている人たちを、いつも殴っ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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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2  

2009年05月24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は、2007年1月26日に、「南方派遣報国隊」にかかわる調査が完了したとして、「‘南方派遣報国隊’真相調査報告書」を議決しました。それが、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に郵送で届いたのは2007年4月17日でした。
 その内容は、このブログの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5~9に掲載しましたが、とうてい「南方派遣報国隊」にかかわる調査が完了したとは、判断できなものでした。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批判を受けて、真相糾明委員会は、「南方派遣報国隊」にかかわる調査が完了したとして議決した「‘南方派遣報国隊’真相調査報告書(2007年1月26日議決)」の公刊をとりやめました。それは、真相糾明委員会が、「南方派遣報国隊」にかかわる調査は完了していないことを認め、調査を継続しようとした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
 しかし、その後、真相糾明委員会から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には、「南方派遣報国隊」にかかわる調査についての報告はありませんでした。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1998年以降、海南島と韓国と日本で、継続的に、「南方派遣報国隊」=「朝鮮報国隊」にかんする「調査」をすすめていました。
 国家機関である真相糾明委員会とは違い、民衆組織である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なしうる「調査」には、限界がありました。
 韓国での「調査」の一端について、キム チョンミが、このブログで、2007年5月20日に、「海南島から生還できた「朝鮮報国隊」の人たちを尋ねて」と題して報告しました。以下に再掲します。

■「京城刑務所假出獄関係書類」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1998年8月から長期間、ソウルの韓国政府記録保存所で、「京城刑務所假出獄関係書類」を調査し、「南方派遣報国隊(朝鮮報国隊)」として海南島に送られ、帰郷できた人たちの「仮出獄書類」217人分を探しだしました(韓国政府記録保存所は、その後、大田に移転し、韓国政府記録院となっています)。
 その後、数年の間に、わたしたちは、海南島から故郷にもどることができた人たちのうち、高福男さん、柳済敬さんと、ほかに二人の人に会って話を聞かせていただくことができました。
 さらにそのほかの人に会うために、わたしたちは、韓国に行くたびに「仮出獄書類」に記載されている本籍地を尋ね歩きましたが、なかなか出会う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民願係に協力を依頼
 2006年3月に、わたしたちは、それまでに会うことができた人と本籍が北朝鮮にある人とを除き、126人について、韓国の本籍地管轄行政区の民願係に、協力を依頼する手紙を送りました。
 民願係とは、韓国の各行政単位に設けられていて、さまざまな問い合わせに対応してくれる部署です。大統領府にもあります。
 126人のうちの10人近くは、これまで本籍地を尋ね歩いて、亡くなっていることがわかっていましたが、あらためて、民願係に協力を依頼しました。
 126通のうち、2006年5月末までに、管轄行政区の民願係からなんらかの返信があったのは、30通でした。
 ひとつの行政区に複数の人がいるばあいもあったので、あわせて42人について民願係が返信してくれました。
 今回の民願係への協力依頼で、すでに亡くなっていることが戸籍簿で確認できた人もいました。戸籍簿では確認できないが、ご存命と思われる人も何人かいました。

■2006年7月
 わたしたちは、2006年7月に韓国に行き、返信をくれた管轄行政区の民願係の4か所を訪ね、さらに個別に調査を依頼しました。
 その結果、残念ながら、ご存命の方はおられませんでしたが、遺族と会ったり電話で話すことができました。
 韓国では、名前と本籍地だけで、本人を探し出すのはとても困難です。韓国の戸籍簿は、戸主が基礎となっていて、本人が戸主のばあいは、比較的探しやすいのですが、そうではないばあい、同姓のすべての戸籍簿を1枚づつ調べ、その家族から同姓同名の人を探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
 各地の民願係は、わたしたちの問い合わせの手紙にたいして、時間をかけて「朝鮮報国隊」の人びとの消息を探そうとしてくれました。
 個人情報保護のために問い合わせには応じられないという返信もありましたが、わたしたちの消息を知りたいと思う趣旨を理解し、第三者が戸籍簿を見るための手続き書類を送ってくれた行政区もありました。

■これから
 韓国では、ほとんどの人の近親者や身近な知人の誰かが、日帝時代に強制連行されたり、軍人や軍属としてアジア太平洋の各地に送られました。
 いまだに「行方不明」となったままの人もいます。
 「朝鮮報国隊」に入れられて海南島に送られ、そこでいのちを失わされた人たちの名前も、まだ明らかになっていません。
 「朝鮮報国隊」の「隊員」として海南島に送られた人びとが、日本兵や刑務官らによってどのようなことをさせられたのか、どのようにいのちを失わされたのか、その真相を、生きて帰還できた人たちとともに、これからさらに追究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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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の「交流」11

2009年05月23日 | 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
 「‘南方派遣報国隊’真相調査報告書」の発刊停止などを求める文書を2007年6月1日に真相糾明委員会に送ったあ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キム チョンミと佐藤正人が、7月23日に、ソウルの真相糾明委員会の事務所で、全基浩委員長、朴聖圭事務局長、李鎮興調査総括課長、呉日煥専門委員、孟康鉉調査官、崔仲植調査官と話し合いました。
 その前の2日間に、キム チョンミら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会員4人は、仁川に行き、呂且鳳さんから話しを聞かせてもらっていました。呂且鳳さんは、日本支配下の朝鮮の光州刑務所から「南方派遣報国隊」に入れられ、海南島に強制連行され、口元が大きく変形するほど激しい暴行を受けながらも生きて帰国できた人です。
 その後まもなく、「‘南方派遣報国隊’真相調査報告書」の発刊は中止され、報告書を作成した孟康鉉調査官は、事実上解任されました。
 
 「南方派遣報国隊」にいれられ日本植民地下の朝鮮の獄中から海南島に連行され、殺され、埋められている朝鮮人は、遺骨となって日本の侵略犯罪を証明しています。「朝鮮村発掘」は、いやおうなしに、日本海軍と朝鮮総督府による朝鮮人大虐殺という歴史的事実を、客観的に明らかにします。
 しかし、韓国政府機関である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は、みずから「朝鮮村発掘」をやろうとしないだけでなく、2006年5月の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試掘」にもまったくかかわろうとしません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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