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

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

「民間人大量虐殺の場所、大田骨嶺谷遺骸発掘現場」

2015年06月30日 | 韓国で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1000.html
「 The Hankyoreh」 등록 : 2015.03.05 18:57
■[이 순간] 민간인 대량학살 터,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65년을 기다렸을 아버지
   진실은 아직도 묻혀있습니다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부터 유가족들의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달 23일 오전,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 유해 발굴이 이뤄지던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은 슬픔이 넘쳐났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자료 및 사진들과 증언자들의 말을 토대로 중장비를 동원해 골짜기의 묵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흙을 걷어 냈을까. 희생자들의 뼈가 하나둘 서로 엉겨붙은 채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유해들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사흘 뒤인 6월28일부터 3차례에 걸쳐 군경에게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과 대전교도소 내 정치범 및 일반사범들이다. 발굴단은 겹겹이 쌓인 유해 옆에 국화 송이를 내려놓고 잠시 예를 올렸다. 유가족 이계성(76)씨는 “60년이 넘은 뼈들은 모래알처럼 으스러지고 있다. 하루속히 국가가 발굴조사에 나서야 한다. 잠깐 나갔다 온다던 아버지는 당국에 의해 끌려간 뒤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1세대가 죽기 전에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며 울먹였다. 아래 흑백사진들은 재미 학자인 이도영 박사가 1999년 12월 비밀에서 해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문서에서 찾아낸 당시 현장 사진 자료들이다. 한겨레 누리집(www.hani.co.kr)에서 더 많은 글과 사진을 볼 수 있다.
            대전/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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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家はなぜ存在するのか:大田山内面民間人虐殺発掘現場」

2015年06月29日 | 韓国で
http://www.huffingtonpost.kr/2015/03/06/story_n_6814196.html
「HuffingtonPostKorea」 2015년 03월 06일 16시 46분 KST  한겨레 작성자 김봉규 기자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 대전 산내면 민간인 학살 발굴 현장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국가는 무엇인가. 국가는 힘없는 국민에게 어떤 존재인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자유를 보장하고 외부의 잘못된 권력이나 폭력으로부터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미군정하에 태어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국가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생각이 다른 국민을 죽여버렸다. 이승만 정권은 한강 이남으로 피신을 하면서 한강대교를 폭파했고 대전에서 머무르면서 대전형무소에 있던 제소자뿐만 아니라 정치범과 민간인들 중에 보도연맹관련 명단을 토대로 헌병대와 경찰이 4천여 명을 대전 산내면 골령골 근처에서 3차에 걸쳐 가차없이 죽였다.
 죽은 이들 속엔 단지 동생이 북으로 월북했다는 이유로만 군 헌병대는 M1 소총으로 뒤에서 머리를 쏘아 죽였다. 억울하게 하소연 한번 하지 못하고 죽어간 영령들은 지난 65년 동안 해도 들지 않은 산골짝 계곡 땅속에 잠들지 못하고 썩어가고 있다.

【写真】한겨레
 유해발굴 도중 희생자 가족 문영자(당시 7살)씨가 학살 당시 이곳으로 끌려와 죽었다는 아버지 문상국(당시 31살)씨의 증명사진을 들고 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공개한 사진에서 처형 직전 돌아보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하고 닮았다고 말했다. 대전/ 김봉규 기자
【写真】한겨레
 유해발굴 첫날인 2월 23일 오전 중장비로 지난 65년의슬픔과 고통을 겉어내고 있다. 대전/ 김봉규 기자
【写真】한겨레
 유해발굴 기간 내내 유가족들은 현장을 찾아 발굴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대전/ 김봉규 기자
【写真】한겨레
 유해발굴은 박선주 충북대학교 명예교수가 발굴단장으로 총괄은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이 현장을 지켰고,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학생들과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학생들이 구슬땀을 흘렸다. 대전/ 김봉규 기자
【写真】한겨레
비참하게 학살당한 희생자들은 유골들이 이리저리 엉키고 설켜서 온전한 형태로 발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대전/ 김봉규 기자
【写真】한겨레
 희생지 뒷쪽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M1소총 탄두와 탄피가 두개골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대전/ 김봉규 기자
【写真】한겨레
 그나마 마른 모래알처럼 분쇄되지않고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뼈는 좀처럼 찾아내기 힘들다. 대전/ 김봉규 기자 b
【写真】한겨레
 팔순을 바라보는 희생자의 아들인 이계성(76)씨도 돌아가신 아버지 이현열(당시 36세)씨의 유골을 찾기 위해 대나무 도구로 흙을 조심스럽게 파내고 있다. 대전/김봉규 기자
【写真】한겨레
 유해발굴 도중에 어제 해 넣은 듯한 금니가 65년만에 햇볕을 보았다. 누구의 가족인지 알 수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대전/ 김봉규 기자
【写真】한겨레
 유해발굴 도중에 살며시 드러난 이름모를 세분의 유골에 발굴단은 국화꽃을 드리우고 영혼을 달랬다. 대전/ 김봉규 기자

 당시 2살배기 어린 딸이 고희를 바라보면서 아버지 뼈라도 찾으려고 말라버린 눈물을 흘리며 계곡을 넘나든다. 뼈는 한동안 특이한 병에 효염이 있다며 누군가에 의해 가루가 되어 팔려나갔다는 증언도 나온다. 60년이 넘은 뼈들은 유해발굴단의 부드러운 붓으로도 부서질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국가는 무엇 하느냐. 국가가 저지른 폭력과 과오를 힘없이 무참히 죽어간 그들의 자식들이 땅을 파고 뼈를 찾아내야 하는가. 그 자식들도 지난 삐뚤어진 역사 속에 어려움 겪어온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자손들이다.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을 풀기 위해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때 단지 생각이 다르고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내몰려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12월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고 해산했다.
 위원회의 활동 기간을 연장해달라는 유가족들의 간곡한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가는 침묵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 2월23일부터 우리나라 최대 민간인 학살 터로 밝혀진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시민사회주도로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등 총 19개의 대전지역 시민단체가 ‘한국전쟁기대전산내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해 공동조사단을 꾸렸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민간인들이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조사는 현장 발굴자료를 토대로 미국 육군정보부에서 비밀해제된 자료와 현장사진 18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국가는 침묵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국가는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가족들의 고통을 위로해야 한다. 그리고 지난 65년 동안 지하 땅속에서 떠돌고 있을 영혼들도 뿐만 아니라 봄바람에도 부서질 정도로 삭아버린 유해를 하루빨리 찾아내 유가족 품으로 돌려보내 져야 할 것이다. 유해발굴 현장에서 만난 한 유가족은 “우리는 대부분 한두 살이었던 어린 아이였다. 이젠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신다던 아버지는 그 뒤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우리 1세대가 죽기 전 진실과 명예회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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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郎月洞山内‘6・25民間人虐殺遺体発掘‘現場で」

2015年06月28日 | 韓国で
「경향신문」 입력 : 2015-03-01 21:34:10 수정 : 2015-03-01 22:08:50  글·사진 이종섭 기자
■대전 낭월동 산내 ‘6·25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현장 가보니

   1.5m 깊이에 뼛조각 빼곡… 지켜보던 유족 한숨·탄식
   정부 발굴 중단, 민간이 나서
   수형자·국민보도연맹원 등 최소 1천명 이상 매장 추정
   특별법 제정 진실 규명해야

 1일 오전 대전 동구 낭월동 2차선 도로 옆의 야트막한 산 아래. 가로 7m, 세로 4m 깊이로 파헤쳐진 흙구덩이 안에서 한쪽이 휑하니 떨어져 나간 두개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미를 손에 든 유해발굴단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자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유해들이 하나둘 형체를 드러냈다. 주변에는 부서진 뼛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60년 넘게 묻혀 있던 한 맺힌 유해들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과거 산내 골령골로 불렸던 이곳은 한국전쟁 때 군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자행된 ‘산내 민간인 학살사건’이 벌어진 장소다.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수형자들과 좌익인사 교화를 위해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원 등 수천명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이곳에서 총살됐다.
 ‘산내 학살’의 진실은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상 조사에 나서면서 일정 부분 세상에 실체를 드러냈다. 하지만 2010년 진실화해위가 해산된 뒤 후속 조치는 모두 중단됐다. 유해발굴을 통한 실체적 진상규명도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 속에서 결국 한국전쟁유족회 등 민간단체가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구성하면서 지난달 23일부터 이곳에서 부분적인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写真】1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민간인 학살 사건 현장에서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흙더미 위에 유해들이 널려 있다.

 발굴 작업 마지막 날인 이날 제한된 시간과 조건 속에서 한 구의 유해라도 더 수습하려는 민간 조사단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현장에서는 희생자의 유해뿐 아니라 총살의 흔적을 보여주는 녹슨 탄피와 탄두도 다수 발견됐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굴 작업이 마무리될 무렵 유해 옆에는 하얀 국화꽃 한다발이 놓였다. 굳은 표정으로 현장을 지켜보던 희생자 유족들의 입에서는 긴 한숨과 탄식이 이어졌다.
 김종현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딱지와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60년 넘게 부모의 죽음에 침묵하며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살아왔다”면서 “학살의 실체를 보여주는 참혹한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니 할 말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민간 공동조사단은 이날까지 일주일간의 발굴 작업을 통해 대략 15~20구의 유해를 확인했다. 유해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돼 정확한 수는 확인하기 어렵다.
 산내 골령골에서는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최소 1800여명에서 최대 7000명 정도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단이 발굴에 나선 지점은 1차 학살 때 최소 1000명 이상이 집단 학살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박선주 발굴조사단장은 “이번 발굴은 지금까지 기록과 증언을 통해서만 확인된 학살의 실체와 매장 형태 등을 확인하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했다.
 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등은 발굴된 유해를 현장 주변에 안치하기로 했다. 이들은 이날 호소문을 통해 “7000여명의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당했음에도 가해자인 국가는 65년간 뒷짐만 지고 있다”며 “정부는 지금이라도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반성하고 특별법 제정을 통해 중단된 유해발굴과 진실규명 사업을 재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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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戦争当時虐殺された大田骨嶺谷民間人遺骸発掘」

2015年06月27日 | 韓国で
http://www.vop.co.kr/A00000851333.html
「민중의소리」 최종업데이트 2015-02-23 12:38:54  구자환 기자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대전 골령골 민간인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국가가 최소한의 책임지지 않아... 6,900여명 가운데 34구만 발굴돼”

【写真】학살 직전의 대전형무소 재소자들 ⓒ공동조사단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무고하게 학살된 민간인들에 대한 발굴 작업을 정부가 중단한 이후 시민단체들이 뜻을 모아 유해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해 2월 18일 출범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23일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 유해발굴지 앞에서 개토제를 진행하고 2차 유해발굴에 들어갔다.
 앞서 공동조사단은 지난해 2월 24일에서 3월 4일까지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에서 학살된 보도연맹사건 민간인에 대한 1차 유해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39명의 유해와 탄두와 탄피, 버클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한 바 있다.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 학살지는 한국전쟁 전후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학살당한 후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를 대량 학살한 곳이다.
 당시 희생자들은 3차례에 걸쳐 모두 6,900여명이 충남지구 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과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 수는 493명으로 2007년에 있었던 진실화해위원회의 유해발굴에서는 34구의 유해만 발굴했을 뿐, 가장 많은 유해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발굴하지 못했다.
 지난 해 2월 18일 출범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23일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 유해발굴지 앞에서 개토제를 진행하고 2차 유해발굴에 들어갔다.
지난 해 2월 18일 출범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23일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 유해발굴지 앞에서 개토제를 진행하고 2차 유해발굴에 들어갔다.ⓒ기타
 공동조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한 채, 지하 광산이나 이름 모를 산속에 버려졌다”며, “그나마 진실화해위원회가 일부 유해와 유품을 수습해 충북대학교에 임시 안치하였으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후에는 국가 차원의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이어,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나라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이뤄내 인권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진상규명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공동조사단의 유해발굴에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등 총 19개의 대전지역 시민단체들도 ‘한국전쟁기대전산내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해 공동조사단의 유해발굴에 힘을 보태고 있다.
 김종현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은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유족들은 이 사실을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며, “이번 유해발굴에 유가족들도 국가폭력과 인권침해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은 한국전쟁유족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 등의 단체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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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兵隊の保導連盟員''大量虐殺'' 最初の具体的証言確保」

2015年06月26日 | 韓国で
http://www.nocutnews.co.kr/news/315410
「노컷뉴스」 2007-07-04 13:46 청주CBS 맹석주 기자 maeng@cbs.co.kr 메일보내기
■헌병대의 보도연맹원 ''대량학살'' 최초 구체증언 확보
  6.25 당시 헌병대 과장 김만식 씨 증언 토대, 전국 조직적 학살 자행

 6.25 전쟁때 강원도와 충북, 경북 북부 지역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학살이 헌병대에 의해 이뤄졌고 최초 학살은 강원도 횡성에서실시됐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국내 최초로 나왔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는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6.25 전쟁 당시 6사단 헌병대 4과장으로 근무하던 김만식(81) 씨의 증언을 토대로 보도연맹원 최초 학살은 6월 28일 강원도 횡성에서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청원 오창창고에서 보도연맹원 370명이 학살된 집단 발포는 6사단 19연대 헌병대에 의해 이뤄졌고 800여 명이 학살된 옥녀봉은 6사단 7연대 헌병대, 음성과 진천의 70여 명 학살은 6사단 7연대에 의해 실시됐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6사단 19연대는 경북 상주와 문경에서 각각 400여 명을 학살했고 영주에서는 350여 명을 학살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는 6사단 헌병대 현장지휘책임자인 김만식 씨의 증언을 토대로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강원도 횡성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보도연맹원 학살이 이뤄졌다는 사실과 구체적인 학살 가해자가 밝혀진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충북에서만 36군데에서 5천800여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된 것으로 드러났으나 총체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고 대부분의 보도연맹사건에서 헌병의 역할이 많았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며 80살이 넘은 생존자에 대한 조사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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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どのように死んだのかだけでも知りたい" 公州民間人虐殺現場に集まった遺族たち、嗚咽」

2015年06月25日 | 韓国で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9896
「OhmyNews」 2007.07.02 02:53 최종 업데이트 2007.08.15 21:29l  송성영
■"왜, 어떻게 죽었는지라도 알고 싶다"
  공주 민간인 학살 현장에 모인 유족들 오열

【写真】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 피해자 유족인 송재문(64)씨가 공주시 왕촌 말머리재에서 위령제가 거행된 날 오열하고 있다.  ⓒ 송성영

 7월 1일. 금강을 옆에 끼고 있는 충남 공주시 왕촌리 말머리재에 사람들이 모였다. 잡목 무성한 야산을 둘러본 60여명이 위령제단 앞에 모였다. 임시로 마련된 제단 앞에서 유족들은 오열했다. 속울음을 울고 소리 내어 울었다. 박옥희(74) 할머니는 제단 앞에 엎드려 일어서지 못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절을 하고 또 절을 했다.
 지난 2001년 이곳 말머리재에서 탄피와 함께 일부 유골이 발굴됐다. 유골들은 30cm도 채 안 되는 깊이에 묻혀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종군기자가 쓴 학살 보도 자료를 근거로 수소문해 세상에 알린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와 더불어 공주 민주시민단체 사람들은 발굴 작업을 멈추고 다시 그 자리에 묻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말머리재에는 한국전쟁 당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민간인들이(700~1000명 추정) 무자비하게 집단 학살돼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령제에 모인 사람들은 그 유골들 위에 서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묻혀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위령제만 올리고 있을 뿐, 국가 차원의 발굴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마이뉴스> 보도가 나간 2001년 이후부터 공주지역민주시민협의회 사람들과 제노사이드 연구회에 의해 누가, 언제, 어떻게 학살을 당했는지 조사하는 작업이 조금씩 진행돼 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초순(인민군이 공주를 점령하기 직전)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와 보도연맹원들이 말머리재에서 학살당했다는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 피해자 유족들의 증언과 당시 정황 등을 근거로 그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6월 30일과 7월 1일, 이틀에 걸쳐 '한국전쟁 전후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의 진상과 배경'을 주제로 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2007년 하계워크숍이 공주대에서 열렸다.

【写真】유족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7월 1일 아침 말머리재 기슭에 임시 제단을 만들어 위령제를 지냈다. ⓒ 송성영

 이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는 7월 중순부터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고 전국적인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본격적인 조사 작업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사 작업의 목적은 한국전쟁 전후 좌우익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피해가 발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사건이 일어났는지 규명하는 것이다. 이번 사업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확대 조사 작업의 토대가 될 것이다. 유족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실시하는 이번 조사 사업은 연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충남 공주시를 비롯해 경남 김해시, 경북 예천군, 전남 구례군과 영암군, 전북 고창군, 충북 청원군, 경기 화성군 등 민간인 집단학살지로 밝혀진 8개 지역을 선정, 한 지역에 5명씩 각각 조사팀을 구성했다.

【写真】6월 30일 '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의 진상과 배경'을 주제로 열린 2007 제노사이드연구회 워크숍. ⓒ 송성영

★한국전쟁 전후 집단 학살당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날 워크숍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들과 보도연맹원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학살됐는지 규명하는 다양한 논문과 증언 기록이 발표됐다.
 지수걸 공주대 교수는 '해방 전후 시기 공주 지역 사회운동사'에서 말머리재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좌익수들과 보도연맹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일제시기에 발행됐던 신문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공주 지역에서는 1920년대 중반쯤부터 청년운동 내부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그때부터 새로운 청년조직이 결성됐고 그들이 지역사회 운동, 혹은 민족민중운동을 주도했다."
 지 교수가 내놓은 1920년대 초기부터 해방 전까지 자료에 따르면 공주에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야학 등을 통해 농민계몽 운동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각성과 애국애족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극단을 만들어 광주, 목포까지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에 의해 사상범으로 투옥된 이들은 해방 후 다시 공주 지역의 좌익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이들이 한국전쟁 전후 좌익사범이나 보도연맹원이 돼 집단 학살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집단 학살당한 사람들의 사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정기 전남대 교수 역시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형무소 실태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일제 치하에 이어 다시 사상범이라는 존재가 등장했다. 일제하의 사상범은 그 이념에 관계없이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장악한 사람은 대부분 일제하의 사상범 출신이었다."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사람들 중에는 좌익 성향의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공주향토사학회원인 이걸재씨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보도연맹원 중에는 좌익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사회운동과는 무관한 일반인도 많이 섞여 있었다.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사람들 중에 좌익만 있는 게 아니다. 당시 면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보도연맹원을 좀 더 많이 가입시켜야 유능하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몇 명씩 가입시켜야 하는 식의 할당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좌익과 전혀 상관없는 가까운 친구의 이름까지 보도연맹 명단에 올렸다고 한다."

【写真】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수와 보도연맹원들의 집단 학살지로 추정되는 말머리재. 2001년 이곳에서 탄피와 일부 유골을 발굴했다가 다시 묻어놓았다. ⓒ 송성영

★보도연맹원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강성현 연구원은 '대전·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학살의 진상'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보도연맹 가입 대상은 자수자였다. 즉 국가보안법 1조에서 규정하는 불법단체 즉 남로당, 민전, 전평, 전농, 민애청, 민학련 등에 가입된 사람들은 모두 자수 대상자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 4조는 '그 정을 알고서 기타의 방법으로 방조한 자'까지 적용 대상을 무제한 확대해 거의 모든 사람이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중략) 그 무렵 지역지인 <동방신문>을 보면 '자수하면 포섭', '전향하면 관대히 용서', '자수하면 죄과는 백지' 등과 같은 온정적인 어투의 선전부터 '완전 개과천선을 요망', '미자수자는 적발, 단호 처단' 같은 위협적인 선전에 이르기까지 신분 보장 선전과 선무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写真】 손주와 함께 위령제에 참가한 시민  ⓒ 송성영

 "보도연맹이라는 이승만 정치권력의 기획 목적은 탈맹을 거친 충성스러운 반공국민의 육성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데 6·25 발발은 보도연맹의 최종 단계를 탈맹이 아닌 죽음으로 동원하는 양상으로 바꿔놓았다.
 전쟁 발발이라는 외부 요인은 보도연맹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던 경찰의 보도연맹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보도연맹의 역작용을 우려했던 검경과 군 내부의 일부 강경인사의 입지를 강화했다.
 보도연맹원은 더 이상 충성스러운 반공국민이 아니라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과 지하의 '빨갱이'들에 부화뇌동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됐다. 그 결과는 군경의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예비검속에 이은 대량학살이었다."
 최정기 교수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형무소 실태 연구'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이 전쟁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해방 이후의 정황들을 보면 정권 차원에서 이미 학살의 씨앗을 키워왔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최 교수는 1948년 제정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된 좌익수들이 포로수용소나 다름없는 열악한 형무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 탈옥과 폭동이 잦았는데, 당시 좌우갈등을 전쟁 상태라고 한다면 형무소는 포로수용소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한강 이남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수형자 학살이 이뤄졌다. (그러나) 어떠한 절차를 거쳐 학살이 진행됐는지, 명령권자가 누구인지, 특별한 지침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아직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 없다."
 이에 대해 강성현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
 "대전형무소 학살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역시 군 쪽에서는 (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서) 송요찬 헌병사령관 소속 헌병대로 이어지는 명령 계통이 있었고, 경찰 쪽에서는 (백성운 내무부장관에서) 이순구 충남 경찰비상경비사령, 전봉수 공주경찰서장으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이 학살을 기획, 예비검속, 수행했다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공주 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단 학살됐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날 워크숍에 참가한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가 이규성씨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당시 총살해 구덩이에 파묻은 사람이 15트럭이라는 얘기를 후에 전해 들었다. (중략) 트럭당 50~60명씩 실어 날랐다고 하니 적어도 700~900명쯤은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오마이뉴스> 2001. 6. 6.)
 강성현 연구원은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문화훈련국이 펴낸 '조선인민은 도살자 미제와 리승만 역도들의 야수적 만행에 복쑤하라'를 인용하고 있다.
 "살인 흡혈귀 미국 침략군대와 리승만의 살인군경들은 지난 7월 7, 8, 9일 3일 간 공주에서 남녀노소를 무차별 학살했다. (중략) 이렇게 공주 일대에서 1천여 명의 애국자와 무고한 인민을 학살…."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문화훈련국에서 밝힌 집단학살 날짜는 강성현 교수와 공주지역민주시민협의회 사람들이 공주 지역 피해자들을 조사해 확인한 날짜와 크게 다르지 않다(7월 7일~9일 사이는 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미군이 금강철교를 폭파한 13일 바로 직전이다).

【写真】피해자 유족인 공주시 의당면 율정리 유찬종(72) 할아버지와 박옥희(74) 할머니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 송성영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에 미군도 있었다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는 당시 사진자료를 통해 미군이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에 개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에 미군들이 단순 개입했는지 아니면 조직적으로 개입했는지 밝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노사이드연구회 워크숍 다음날인 7월 1일, 말머리재 집단학살지에서 위령제를 마치고 유족들과 함께 현장 답사를 떠났다. 현장에 도착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유족들의 눈물처럼 내렸다.
 피해자들이 공주형무소로 끌려가기 전에 갇혀 있었다는 공주시 의당면 율정리와 또 다른 학살지로 추정되고 있는 여찬리 등을 답사하면서 피해자 유족인 유찬종(72) 할아버지와 박옥희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다. 이곳 율정리 마을에서만 무려 19~23명에 이르는 학살 피해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트럭에 실려 가는 걸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여태 어디로 끌려가 어떻게 죽었는지 묻지도 못했다."
 그렇게 피해자 유족들은 57년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고 있었다.
 "자식 된 도리로서 알고 싶다. 어떤 죄를 지어서 어디로 끌려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만이라도 알 수 있게 해 달라."
 57년, 반세기가 넘도록 골수에 사무쳐 있던 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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裁判官忌避申立却下にたいする特別抗告理由書

2015年06月24日 | 紀州鉱山
 きょう(6月24日)、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最高裁に、特別抗告理由書をだしました(6月22日に投函)。
 その本文の全文は、つぎのとおりです。


■特別抗告理由書

事件の表示
  特別抗告提起事件番号 2015年 (行セ)第13号
  即時抗告事件 名古屋高等裁判所 2015年(行タ)第20号
  基本事件 名古屋高等裁判所 2015年(行コ)第10号(2012年度固定資産税賦課処分及び
      減免不承認処分取消請求事件)


特別抗告の理由
 原決定は憲法32条に違反している。
 原決定は、裁判官の憲法に違反する行為を特別抗告人に認めることを強制するものである。これは特別抗告人の憲法32条「裁判を受ける権利」を侵害するものである。

 特別抗告人らは、本年2月24日に名古屋高裁民事3部に「控訴理由書」をだした。
ところが、同じ2月24日に名古屋高裁民事3部の揖斐潔裁判官、眞鍋美穂子裁判官、片山博仁裁判官は「口頭弁論期日」を5月11日とする「期日呼出状」を発行した。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会員である特別抗告人らが提起している訴訟は、日本国家と日本企業の朝鮮侵略・朝鮮植民地支配の責任にかかわる重大な訴訟である。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この訴訟において、弁護士を依頼することなく、本人訴訟をおこなっている。
訴訟の歴史的重大性、本人訴訟という条件からして、この控訴審において基本的な諸問題を十分にのべる「準備書面」の作成には膨大な時間と労力が必要である。また、この控訴審においては、その本質からして、特別抗告人は、韓国の遺族をふくむ関係者と綿密な連絡をとりあわなければならない。
 それにもかかわらず、名古屋高裁民事3部は特別抗告人らが「控訴理由書」をだしたのと同じ日に、特別抗告人の意向をまったく無視して、その2か月半後を期日とする「期日呼出状」を発行した。
本訴訟の本質の詳細な提示、さらに津地裁の空疎で悪質な判決にたいする批判、被告・被控訴人である熊野市が雇用した弁護士が作成した空疎で悪質な文書にたいする批判……のためには数か月~半年という時間が必要である。
特別抗告人らは、努力をして、期日を7月にすることを名古屋高裁民事部に告げ、つづいて最大限の努力をして期日を6月にすることを告げた。
 しかし、名古屋高裁民事3部は、強権をもって期日を5月11日に指定し、控訴人らを呼出すことによって、実質的な審理を求める特別抗告人らの正当な権利を侵害した。
裁判は、裁判官のためにあるのではなく、憲法で裁判を受ける権利を保障されている民衆のためのものである。従って、口頭弁論の期日においては、控訴人らの要望が尊重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訴訟の重大性と民衆の裁判権の原則を考慮できず、控訴人が十分に訴訟準備をする時間を奪い、控訴人の裁判をうける権利を実質的に強権的に侵害して口頭弁論を開始しようとした名古屋高裁民事3部の担当裁判官(揖斐潔裁判官、眞鍋美穂子裁判官、片山博仁裁判官)は裁判の公正を妨げ、特別抗告人の憲法32条「裁判を受ける権利」を侵害した。
 また、裁判官は、「裁判官は、その良心に従い独立してその職権を行い、この憲法及び法律のみ拘束される」という憲法第76条第3項を厳守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のためには、訴訟指揮において、裁判官は、憲法11条「基本的人権の享有」と憲法14条「法の下の平等」を遵守しなければならない。
 紀州鉱山で亡くなった朝鮮人を追悼する碑の公共性、紀州鉱山への朝鮮人強制連行にかかわる訴訟において、特別抗告人らから十分な準備時間を奪いつつ裁判(口頭弁論)を強権をもって開始しようとした揖斐潔裁判官、眞鍋美穂子裁判官、片山博仁裁判官の行為は、紀州鉱山で亡くなった朝鮮人の基本的人権を侵害するものであり、憲法11条「基本的人権の享有」に違反する行為である。

 そこで特別抗告人らは、名古屋高裁民事3部裁判長裁判官揖斐潔、裁判官眞鍋美穂子、裁判官片山博仁の訴訟指揮の下では、不公正な裁判がなされるので、本件の審理をこの3人の裁判官が担当することがあってはならないと判断し、本年5月11日に3裁判官の忌避を申し立てた。
 しかるに、名古屋高裁民事第4部の筏津順子裁判長、長谷川恭弘裁判官、上杉英司裁判官は、5月27日付で、この申立てを却下した。
十分に訴訟準備をおこなう時間を特別抗告人らに保障しようとしないで裁判(口頭弁論)を強行し実質的審理を放棄する裁判官を忌避することは当然のことであり、その申立てを却下することは、特別抗告人の憲法32条「裁判を受ける権利」を侵害するものであり違憲である。
この却下は、揖斐潔裁判官、眞鍋美穂子裁判官、片山博仁裁判官がおこなった憲法11条「基本的人権の享有」違反と憲法14条「法の下の平等」違反行為を、容認するものである。
なお、「法の下の平等の原則」に外国人が含まれることは、最高裁判所判例(1964年11月18日)に示されている。
 この違反行為を容認して名古屋高裁民事第4部筏津順子裁判長、長谷川恭弘裁判官、上杉英司裁判官が5月27日付でおこなった忌避申立棄却決定は、憲法第76条第3項に違反し、憲法32条に違反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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裁判官忌避申立却下にたいする特別抗告状

2015年06月23日 | 紀州鉱山
 5月27日に、名古屋高裁民事4部の筏津順子裁判長、長谷川恭弘裁判官、上杉英司裁判官は、名古屋高裁民事3部の揖斐潔裁判長、真鍋美穂子裁判官、片山博仁裁判官にたいして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5月11日におこなった忌避を却下をしました。
 それにたいし、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それに抗議し、名古屋高裁民事4部の3裁判官の却下を取消し、名古屋高裁民事3部の3裁判官の忌避を認めることを要求する特別抗告状を、6月6日に最高裁にだしました(6月5日に投函。手続的には、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特別抗告状を名古屋高裁が最高裁に送ります)。
 特別抗告状の本文の全文は、つぎのとおりです。
 これまでの経過については、このブログの5月8日「強権的に控訴審の日を「指定」した名古屋高裁に抗議する」、5月9日の「津地裁最終口頭弁論以後の経過」、5月11日の「裁判官忌避申立理由書」をみてください。


■特別抗告状
 裁判長揖斐潔、裁判官眞鍋美穂子、裁判官片山博仁に対する忌避申立事件(基本事件・名古屋高等裁判所 2015年(行コ)第10号 2012年度固定資産税賦課処分及び減免不承認処分取消請求控訴事件)について、同裁判所が2015年5月27日になした下記決定(2015年6月1日告知)は、不服であるから、特別抗告を提起する。

原決定の表示
  主文
  本件忌避の申立てをいずれも却下する。

特別抗告の趣旨
  原決定を破棄し、更に相当な裁判を求める。

特別抗告の理由
  おって、特別抗告理由書を提出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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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向全  遺留在海南島的港人」

2015年06月22日 | 海南島史研究
http://www.geocities.ws/phwwii/Nishimatsu_context.html
■討回歷史正義和公道 譴責西松建設的歷史認識

http://www.geocities.ws/phwwii/Nishimatsu_appex2.html
★向全  遺留在海南島的港人
  我是一九一七年出生,今年八十五歲(二零零一年『虛歲』),廣東清遠人。一九三二年和兩個朋友到香港,居於香港灣仔。一九四一年十二月,由于日軍侵佔香港,失去了工作。一九四二年春節前,從朋友那里聽到名為『合記』的公司招聘人手,我實在找不到別的工作,只好去報名。我原來是在香港做過建築工人的(俗稱三行工人),但是報名時想建築工人待遇不好,伙夫(炊事員)行動較自由待遇好些,所以到合記公司報名做伙夫(炊事員),香港的那公司負責人對我們說到海南島工作一年回來,一日工資為七毫錢,一星期有一天休息;大概一九四二年二月左右,上了船往海南島,這是經過『合記公司』從香港到海南島的第六批,這批約有五百四十多人,有一個總管,總管下有五個頭目,每個頭目之下又有二手,二手之下有苦力,而每個頭目管一○八人,一個總管就是管轄五百四十人了。
  航行了七天後抵達了海南的八所。因為我是伙夫,頭一星期要進行身體檢查,日軍天天都要拿肛門糞便作化驗,所以頭一星期是沒有工作的,後來一星期過後,進行分工,安排到一個叫平井的日本人所帶領的一個班那裡(所以就稱為『平井班』)當伙夫。這工段是修路基的,離八所34公里因此稱為34區。那里掛著『西松組株式會社平井班』的木牌子。在平井班幹了大概半年後路基修完調到41區。
  41區在寶橋(現在的叉河),在昌化江的八所的方向。41區由西松組大成班(或是大城班)負責,大成班什麼都要幹,如修路和補橋等等。到了41區我開始做木工。當時的勞工被勞役一整天,早上六時工作至下午六時,足有十二小時,有時甚至超出十二小時。到了凌晨工頭用木棍子打醒勞工,有的躺著已經死去的,工頭還繼續敲打,滅絕人性。而且建一段鐵路,每一件在鐵路上的石塊都要死人,可想而知辛勞的慘無人道情況。
  1944年在寶橋死亡的越來越多,開始時用汽油燒,後來汽油不夠了,在叉河那裡挖洞坑埋,一個洞多能埋七、八人左右,少的也有兩、三個人,那些狗嗅到了屍體的味道,挖出屍體來吃,那些狗吃不完的就被烏鴉吃掉屍體,日本可真兇殘。死因是飢餓、營養失掉、生病、挨打等。只要勞工們工作稍有怠慢,日軍見狀立刻毆打。當時我們吃又吃得不飽,生病不能上工的還被減半,穿又沒有衣服供給穿,只用一些水泥袋蓋上身體遮蔽當作衣服穿。讓我們住的是草房,約5米,長約10米(有的長20米),沒有地板、被褥。雖有衛生所,但是我們都不敢去,因為有去無還,比如和我一起的三個?夫被拉進衛生所後,都死去了。
  到了一九四五年,日軍自知將會敗戰而準備撤退,令糧食供給更為緊張,每天只發放三兩六米糧,和只供給少量蕃薯,而做領導的可先拿糧食,而隨意拿比勞工多的糧食,只勞工發配這麼少糧食,根本上誰都吃不飽,更遑論其他。再者在香港時合記公司的人說給我每星期有一天休息,根本沒有這回事,而且每天都要開工沒有休息,才知道被欺騙了。
  工資是有發出的,可是我自己沒有完全用掉一個月的工資,還叫海南島的西松組有關人員委託香港合記公司將自己每月的工資中拿出十元發放給在港的我母親,但因當時在日軍統治下是不能寫書信聯係,根本沒法得知母親是否有薪餉發出,投降後在一九四六年回經香港上廣州,委託朋友傳給他母親在廣州會面,才得知在海南島時西松組幾年來只出了頭一個月的十元工資給母親,其餘根本沒有發過,才明白又被欺騙了。
  一九四五年三、四月左右被調度往榆林的奧野班(還是西松組的一個班),但是日軍都自知將會敗戰,大成班已經走了。奧野班住的是草房,當時糧缺饑荒,咱們都要去了剝樹皮和草皮吃,甚至連吃牛皮的因消化不良而死,幸好自己未有死去。
  至日軍投降後,從香港騙招來的勞工死去大多數,很少部份勞工被運返香港或廣東,而且日軍投降後被國民黨政府接收海南島。我被迫當坦架兵,後來說讓我們到東北攻打共產黨,我想現在海南沒法回香港,到了東北更沒有希望回香港。所以我三天不吃飯便詐病不從軍,後來真的病了起來,便準予在廣州後方醫院養病。跑出醫院後又被國民黨抓住到海南。後來國民黨戰敗退守台灣,共產黨解放海南島,一直居住在海南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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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霖  流落在海南島的港人」

2015年06月21日 | 海南島史研究
http://www.geocities.ws/phwwii/Nishimatsu_context.html
■討回歷史正義和公道 譴責西松建設的歷史認識

http://www.geocities.ws/phwwii/Nishimatsu_appex3.html
★馬霖  流落在海南島的港人
  一九一六年八月五日出生,廣東江門人。自小在新會長大,在一九三五年在新會瞧蓮時十九歲,有那一年的某一天(正確日子不詳),睡醒過來的天亮後,發現日軍遍佈整個地方,母親和妹妹都被日軍的大量轟炸下被炸死,當時被日本的特務毆打。過了幾年後,於一九四一年十月中下旬到香港。當時日軍尚未侵佔香港,在香港的工會朋友介紹底下,在北角七姊妹道的商務印書館工作。
  不久從朋友口中得知香港的一間合記公司招聘人手,去見工後被聘用。被合記公司安排在中環一幢樓住,一層樓住了五百多人,沒有床,所有人都要打地鋪躺在地上睡覺。一個人有二十兩米,三毛錢菜,有大鍋飯一同吃,但是要有飯票配給,被編配了448的編號,而且所有人都有編號的,工資有七毛錢一天。
  到同年十二月下旬,日軍發動軍隊侵襲香港島,當時英軍勢孤力弱,其時港督楊慕投降,香港淪陷,被日軍統治。日軍佔領香港不久,被日軍強迫他們背著舊式的機關槍的「水龍機」,灣仔附近一個水塘拿水,如果不去就威嚇要殺頭。
  終於到了一九四二年二月上旬出發往海南島,當時有很多批人在前後時間運往海南島,自己是第四批來,有五百四十人,上的那一艘船在船上有一個大名字,叫「大球丸」號,同月六、七號左右其中一天離開,航行了幾天,經過一小島附近的時候,日軍接到電報通知附近有美軍艦隻,所以停留了幾天才繼續開船。十四號那一天到達愉林港,被一個名為「抬拓株式會社」安置住在毛草房。此抬拓株式會社是編制在海軍陸戰隊之下的,但陸戰隊的士兵較為不暴力,不會胡亂打人的。不久知道了有十多批人抵達海南島。
  他被日軍強迫在榆林港做木匠,負責做開山填海的工作。這些工程都因太辛勞,死了太多人,有病的就去到日軍建設的「同仁醫院」醫病,但是十個入醫院的,有八、九個都出不了來死掉,日軍就負責叫人去埋了這些屍體 (可見日軍之殘酷)。
  當時糧食只有配給,每人只有三兩大米糧,當時他們逃亡,想逃出找共產黨,去了一家「海南水產公司」。抬招株式會社的人員拿他們的相片找他們,找到後回牢房把他們毒打,質問他們是否找共產黨,他們不敢回答,最後還是要把他們放走,賣給另一家日本公司「大日本造船廠安由株式會社」,就這樣他們就安排去到這間公司工作。
  安由株式會社有一個日本人,名叫依多生,是管工,很兇惡。見他們稍為有偷懶,就要體罰,要他們跪下,雙手舉高抬一盆水,不容許水倒下來,如果有發現水倒下來的話,日軍拿來一木棍,就會毒打他們腰部,後抵受不住暈倒了,把他抬回去,沒有人去醫護他,他自己只好用山草藥敷上,慢慢的就痊癒。但是又會經常被毒打,而且常赤手猛力的掌摑耳光,弄得他頭部有後遺症,間常頭痛舊患令頭部痛楚。
  後來他到了石碌的「石碌鐵礦株式會社」工作,是台灣人和日本人一同開設的,在這裡工作直到日本投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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