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吉城との対話

日々考えていること、感じていることを書きます。

민족주의 선교

2020年12月02日 05時26分52秒 | エッセイ

 オーストラリア在住の親友韓相大さん、シドニー大学の元教授である彼が運営する大韓学校で昨日最新拙著「親日と反日の文化人類学」(タイムライン)というタイトルで講義をした。ところが韓さんが入院中で欠席。とても心配になり寂しかった。
  私は38度線の下の小さな村で生まれ、朝鮮戦争の苦戦場、売春婦の村と化した故郷を出てソウルに転校し、ソウル大学師範大学で文学と心理学、教育学などの影響を受け、研究と教育の生涯、その歩みには大きな変化があった。 
  日本留学を終えて帰国して「親日派」という非難を受けたことで植民地研究に力を注ぎ、韓日関係にも言及することになった。 多くの人々から日韓の「友好の架け橋」とほめられることもある。ところが私はその「架橋」から落ちそうな状況になる時が多いと冗談を言ったもする。
 40分間の私の話に続き、多くの方々と90分ほど討論をした。1935年生まれの女性の尹氏は日本の植民地時代を肯定的に証言し、金哲圭さんらは韓国の発展と関連し、戦後日本の影響が大きかったことを指摘した。唯一、宣教牧師の金ギュボク氏は日本を非難する言葉として、私の講義時間程度を論じた。結局老長老の仲裁で討議を締め切ることになった。 
 植民地の開化期に日本のキリスト教教団の組合教会などが韓国に宣教、総督府の植民地政策に応じる宣教に屈服するように変わっていった。そしてほとんどすべての教団が植民地政策に屈するまでに至った歴史がある。いま反対の現象がおこっている。宗教ビザを取りやすい日本に韓国から多くの宣教師が来ている。多くの宣教は民族主義で行われている。私は牧師に向かって「人類愛」についての説教をしたことになった。

호주 거주의 친한 친구 한상대씨가 운영하는 시드니대학 전 교수인 그가 운영하는 대한학교에서 어제 <친일과 반일의 문화인류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그런데 한씨가 입원중 불참되어 매우 염려되고 섭섭했다.
 나는 38선 밑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6.25전쟁의 고전장, 매춘부의 마을로 변해 버린 고향을 떠나 서울로 전학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문학과 심리학, 교육학 등의 영향을 받아 연구와 교수 생활의 생애, 거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음으로 식민지 연구에 힘을 쏟아 드디어는 한일관계에 영향을 받고 주는 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한일간의 <우호의 다리>를 놓는다고 칭찬하여 주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다리 <가교>에서 떨어지는 지경에 있을 때가 많다고 우스게소리를 하고는 한다.
 40분간 나의 설명에 이어 많은 분들과 90분 정도 토론을 하였다. 1935년생 여인 윤씨는 일본 식민지 시대를 긍정적으로 증언하고, 김철규님 등은 한국의 발전과 관련하여 전후에 일본 영향이 컸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유일하게 선교 목사 김규복씨는 일본을 비난하는 말로 거의 나의 강의 시간 정도 논하였다. 결국 노장로의 중재로  토의를 마감되었다. 
 식민지 개화기에 일본의 기독교 교단 조합교회 등이 한국에 선교, 총독부 식민지 정책에 응하는 선교로 변하여 갔다. 결국은 거의 모든 교단이 식민지 정책에 굴복하는 지경에 이른 역사가 있다. 지금 반대의 현상이 일고 있다. 종교 비자얻기가 쉬운 일본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민족주의 선교가 흥행하고 있는 것을 실감한다. 목사에게 내가 인류애에 대해 설교하는 식으로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