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吉城との対話

日々考えていること、感じていることを書きます。

渋沢敬三

2021年04月18日 05時36分17秒 | エッセイ
渋沢栄一のドラマ
崔吉城
渋沢栄一氏の顔写真が新しい紙幣に載ると発表されてから急に注目されるようになった。NHKでドラマが放映されている。歴史の教科書を読んでいる気分である。出生から始まり、出世するまでの伝記や英雄談の始まりのようである。韓国では日本の近代化、資本主義による朝鮮侵略の中心人物だと猛批判されていた。
ドラマより面白い本がある。その一家の勤勉と遊蕩の興亡が描かれている佐野眞一氏の著書『渋沢三代』の家門の栄光の話がそれである。栄一が作り上げた栄光を息子が亡くし、孫の敬三が作り直したという大河ドラマのような本である。つまり祖が作り上げた家門の栄光を息子が放蕩して、孫が徳を積み上げた貴重な教訓の話である。
渋沢敬三は人格者であり財力も見識もあり、日本民族学會を創始した人である。栄一がパリから帰りに、最新のムビーカメラを買ってきて敬三にプレゼントした。敬三はそれを以て貴重な映像を多く残している。民族学者が残した映像として貴重なものである。それらの資料を多く所蔵している神奈川大学でシンポジウムが行われた。そこで私は渋沢家の子孫たちにお会いしたことがある。
敬三が撮影した映像の中で特に私が関心を持ったのは1936年の夏、朝鮮半島の蔚山と多島海の映像であり、植民地朝鮮での唯一の記録映像である。私は拙著『映像が語る植民地朝鮮』(東亜大学東アジア文化研究所、民俗苑)などでその時代の生活ぶり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るその映像を紹介した。後にその映像は『甦る民俗映像』(岩波書店)に収められた。
この映像には二つのエピソードがある。一つは蔚山達里での映像の画面から私は麦わら帽子に巻いたリボンが映画のフィルムであることに気が付いた。私は子供の時にフィルムのリボンを巻いた帽子をかぶったことがあり、映っている画像を観察した覚えもある。当時の映画・映像のフィルムは切り、リボンとして再利用して売ったので保存はされていない。それが韓国では映画フィルムが多く残っていないことを物語る証明になる。私はその話を拙著に書き、時々講演もした。それを聞いたある教授が自分で見つけたよう語るのを聞いて、驚きと悔しさを隠せなかった。
もう一つのエピソードは蔚山大学で招請講演をしたことがあり、1936年の映像を見せながら話をした。高齢者たちは「蔚山達里」(宮本:14分)を視聴して「これは偽作である」と言い出した。日本人が朝鮮植民地の成功を見せかけようと作った映画だと言われた。驚いた。翌日朝のテレビ全国ニュースでは私が日本から偽作を持ってきて見せたと流れ、さらに驚いた。また比較民俗学会で上映するように依頼され、見せたが有名な民俗学者が講演で「やはりこの映像は偽作だ」と言いきった。再度驚いた。唖然、失望の極みだった。高齢者たちの思い違いか、反日感情によるものか、私は高齢者へのインタービュー調査を疑う証言への不信感を持たざるを得なかった。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드라마
최길성
시부사와 에이이치씨의 얼굴 사진이 새 지폐에 실린다고 발표되면서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했다. NHK에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역사 교과서를 읽는 기분이다. 출생부터 시작해 출세하기까지의 전기와 영웅담의 시작인 듯하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근대화, 자본주의에 의한 한국 침략의 중심인물로 맹비판되었다.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책이 있다. 그 일가의 근면과 방탕의 흥망이 그려져 있는 佐野真一氏사노 신이치의 저서 시부사와 3대 가문의 영광 이야기가 그것이다. 에이치가 만들어낸 영광을 아들이 없애고, 손자 게이조가 다시 만들었다는 대하드라마 같은 책이다. 즉 조상이 이룩한 가문의 영광을 아들이 방탕하고, 손자가 다시 일으킨 교훈의 이야기이다.
시부사와 게이조는 인격자이며 재력과 식견도 있어, 일본민족학회를 창시한 사람이다. 에이치가 파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최신 무비카메라를 사다가 게이조에게 선물했다. 게이조는 그것으로 귀중한 영상을 많이 남겼다. 민족학자가 남긴 영상으로서 귀중한 것이다. 이들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가나가와대학에서 심포지엄이 열렸다. 거기서 나는 시부사와 가문의 후손들을 만난 적이 있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1936년 여름 한국 울산과 다도해의 영상이며 식민지 조선에서의 유일한 기록영상이다. 나는 『영상이 말하는 식민지 조선』(동아시아문화연구소,민속원) 등에서 그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그 영상으로서 소개했다. 나중에 그 영상은 '살아나는 민속 영상'에 수록되었다.
이 영상에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화면에서 밀짚모자에 감은 리본이 영화의 필름임을 내가 발견했다. 나는 어릴 때 필름 리본을 두른 모자를 쓴 적이 있어, 그런 화상을 관찰한 기억도 있다. 당시의 영화·영상의 필름은 잘라, 리본으로서 재활용해 팔았으므로 보존은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한국에선 영화 필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나의 책에 썼으며 가끔 강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어떤 교수가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웠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울산대에서 초청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1936년 영상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들은 「울산 달리」(미야모토:14분)를 시청하고 「이건 위작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조선 식민지의 성공을 가장하기 위해 만든 영화라고 했다. 놀랬다. 다음날 아침 TV전국뉴스에서는 내가 일본에서 위작을 가져와 보여줬다고 해서 더욱 놀랐다. 또 비교민속학회에서 상영하도록 의뢰받아 보여줬는데 유명한 민속학자가 강연에서 역시 이 영상은 <위작>이라고 잘라 말했다.다시 한 번 놀랐다. 아연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노인들의 오산인지, 반일감정 때문인지 노인 인터뷰 조사를 의심하는 증언에 대한 불신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