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吉城との対話

日々考えていること、感じていることを書きます。

帝国の慰安婦

2013年09月29日 07時13分19秒 | エッセイ

 私は文化人類学講義で人間の性の原初的な面、すなわち結婚と家族、配偶者外の性、売春と遊郭の歴史、性と芸術および娯楽、妓生と芸者、軍と戦争での性、社会的ジェンダー、フェミニズム、社会悪としての性犯罪などを扱っている。 特に私が体験した朝鮮戦争で、人が死んだり負傷したりしている状況で人間失格的なものを見たのを土台に論文も数編書いた。 植民地研究では植民地遺産としての慰安婦問題、それは 政治的に再生産された問題を客観的に見るということがどんなに難しいかを実感している。
 慰安婦問題に正面突破した朴裕河氏の本が到着した。慰安婦問題を客観的で見てわかりやすい平坦明快な文章で記述している。私はこの本を読みながら色々な問題を考えた。 私の植民地研究は朴氏の研究とはたくさん重なる所がある。 より一層著者のに大きく期待しながらこの本を読んだ。 内容は、国家の管理、業者の加担、強制連行と国民動員、罪と罰、人身売買と売春、慰安所、韓国人協力者、挺身隊、被害意識、慰安と愛、慰安婦の帰還、公的記憶創り、性的奴隷、日本人の植民地認識、愛国の慰安婦、謝罪と補償、河野談話の問題を扱っている。
 私は過去韓国の日本学科に身を置いていた時、韓国の日本語日本文学系では主に日本の作家を紹介することが主をなしいた。当時 私は文学中心の限界を抜け出して外国学として社会的問題を扱うことを主張したものである。この 著者は日本文学を専攻した方として当面の慰安婦問題を対象に記述したという点でこれまでの変化を実感しただけでなく日本に対する研究を大きく進展させたと賛辞を送りたい。
 私は人間の性を基本的に肯定的に見る。性はとても動物的である。性交と結婚(カップル)は鳥類や類人猿などでもあることである。性モラルは別になくとも結婚し家族を作って生きてきた長い人類史がある。ところが性を神聖視して貞操を強調するなど宗教的文学的性愛と性モラルが強調されながら性を抑圧して抑制する文化が発生した。フーコーは性の快楽性を抑制した宗教を検討して人間の性、すなわち快楽の本質を検討した。性を管理することは普遍的だが社会によってその程度と方法はとても多様だ。
 この本を読みながら私は韓日間の政治的葛藤の問題よりは性への認識に対する根本的な差を感じた。慰安婦のというのは快楽の現場で文字そのまま慰安である。性交自体を労働で見るかという問題は別に置いて、それ自体を苦役、犠牲、恥でだけ見ることはできない。夫婦の性交が神聖ならばいかなる性交性愛も神聖だろう。売春を醜業といいながらも公娼と認定したことは東洋、西洋を問わず一般的だった時代があった。戦後にそのような歴史を否定してほとんど公娼を認めなくなったことは性を抑制しようとするのではなく性を夫婦愛や恋愛、夫婦などの次元でよく管理しようとすることである。
 韓国は儒教的性モラルができて、一夫従事すなわち女にだけ貞操を強調する文化になって性に対する見解は基本的に女性に限った。キリスト教の性モラルとは全く違う。私はこのような朝鮮朝社会の代表的な女性教育テキストであった『内訓』『女犯』等を分析して批判的な見解を学会に提示したことがある。最近では米軍キャンプの強姦と売春に対しても学会に発表したことがある。私が米軍の性暴行に対して口述対談した本が韓国テレビに嘘つきとして罵倒されたことはくやしい。
 私は和解のために本質的な問題に学問的に接近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は著者と同感である。しかし一般社会というものは本質を抜け出して民衆の関心によりうわさを作って、それを式で形成していくことがあるからそれを学問的に捉えて立て直すことはほとんど不可能に近いだろう。社会というものはとかくそのような俗物のである。無知が有識を支配する構造は永遠に変わらないだろう。そのような世の中と戦うのは時間の浪費かもしれない。 などの言葉の意味も誤解されている部分も多いのでかなり努力が必要であろうし変えることは難しいだろう。しかし、この本を読みながら彼女によって韓国アカデミズムが進展することを期待してみる。


『제국의 위안부』.

2013年09月29日 04時42分35秒 | エッセイ
나는 문화인류학 강의에서 인간의 성의 원초적인 면 즉 결혼과 가족, 가족 밖의 성, 매춘과 유곽의 역사, 성과 예술 및 오략, 기생과 계이샤, 군과 전쟁에서의 성, 사회적 성인 젠더, 페미니즘, 사회악으로서의 성과 범죄 등을 다루었다. 특히 내가 겪은 한국전쟁에서, 사람이 죽고 사는 지경에서 인간실격을 본 것을 토대로 논문도 수편 썼다. 식민지 연구에서는 식민지 유산으로서의 위안부 문제도 되외시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 키워진 문제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정면돌파한 박유하씨의 책이 필자로부터 도착하였다. 이 책은‘위안부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고 알기 쉽기 평탄명쾌한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내용은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란 서문에서 시작하여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강제연행과 국민동원, 죄와 벌, 인신매매와 성매매, 위안소, 한국인 협력자들, 정신대, 피해의식, 위안과 사랑, 전쟁터의 포주들, 위안부의 귀환, 공적 기억 만들기, 성노예, 일본인의 식민지 인식,‘애국’의 위안부,사죄와 보상, 문제의 발생과 경과, 고노 담화 특히 2부에서 사죄와 보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과거 일본학과에 몸담고 있을 때 한국의 일어일문학계에서는 주로 일본 작가를 소개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나는 문학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 외국학으로서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를 주장하였다. 저자는 일본문학을 전공한 분으로서 당면한 위안부 문제를 대상으로 기술하였다는 점에서 그간의 변화를 실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한 연구를 크게 진전시켰다고 찬사를 보낸다.
나는 샤머니즘의 연구에서 시작하여 일제시대의 선행연구자인 일본인들의 연구로 연계되고, 다시 식민지 연구로 확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처음 국문학,민속학에서 출발하였으나 민족주의적 성격을 벗어나고자 문화인류학으로 전환하여 식민지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일간을 왕래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일관계가 개선되기를 열망하고 있는 사람의 하나이다. 나의 식민지 연구는 저자의 연구와 많이 결치고 있다. 더욱 저자의 <화해를 위하여>에 크게 기대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인간의 성을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본다. 성은 아주 동물적인 것이다. 성교와 결혼(커플)은 조류나 류인원 등에서도 있는 것이다. 성 모럴이 별로 없이도 결혼 가족을 만들어 살아와도 이혼도 적게 살아 온 긴 역사가 있다. 그런데 성을 신성시하고 정조를 강조하는 등 종교적 문학적 성애와 성 모럴이 강조되면서 성을 억압하고 억제하는 문화가 발생하였다. 푸코는 성의 쾌락성을 억제한 종교를 검토하여 인간의 성 즉 쾌락의 본질을 검토하였다. 성을 관리하는 것이 인간성의 본질인 것은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와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일간의 정치적 갈등의 문제보다는 성의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느꼈다. 위안부의 <위안>이란 쾌락의 현장이고 문자 그대로 위안이다. 성교 자체를 노동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그 자체를 고역 희생 수치로만 볼 수는 없다. 부부의 성교가 신성하다면 어떠한 성교 성애도 신성할 것이다. 매춘을 추업으로 여기면서도 공창으로 인정하였던 것은 동서양을 묻지 않고 일반적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전후에 그런 역사를 부정하고 거의 공창을 인정하지 않게 된 것은 성을 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을 부부애나 연애 부부 등의 차원에서 잘 관리하려는 것, 억제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유교적 성 모럴이 생겨, 일부종사 즉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조하는 문화가 되어 성에 대한 시각은 기본적으로 여성에 한하였다. 기독교의 성모럴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이러한 조선조 사회의 문제의 촛점이 교과서 였던 <내훈> <여범> 등을 분석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학회에 제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미군 캼프의 강간과 매춘에 대해서도 학회에 발표한 적이 있다.내가 미군의 성폴행에 대해 구술 대담한 책이 한국 텔레비죤에 거짓말쟁이 <신친일파>로 매도된 것은 분한 일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내가 초창기 창립멤버인 학회에서 나를 배제한 학회에 대한 실망은 아주 크고 깊다.
나는 화해를 위해서 본질적인 문제에 학문적으로 접근하여야 한다고 저저에 동감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사회라는 것은 본질을 벗어나 민중의 관심에 따라 소문을 만들고 그것을 <우격다짐> 식으로 형성해 나가는 것이니 그것을 학문으로 되잡아 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회라는 것이 그런 속물들의 <세상>일 뿐이다. 그런 세상과 싸우는 것은 시간 낭비인 것이라 생각된다. <정대협> <강제연행> <종군위안부> 등의 말의 뜻이 무지 오해에서 생긴 것인데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에 의해 한국 아카데미즘이 진전될 것을 기대해 본다. 그러나 무식이 유식을 지배하는 구조는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