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そぞろ歩き韓国』から『四季折々』に 

東京近郊を散歩した折々の写真とたまに俳句。

エッセイ2 동경 일일 구경 東京一日観光2

2016-06-08 20:19:07 | 日記・エッセイ・コラム

【韓国語】

3.요시와라 신사(吉原神社)

이케나미 쇼타로 문고에서 고토토이 도로(言問い通り)를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국제 도로(国際通り)가 나온다.  거기에서 북쪽으로 돌고 조금 걸어가면 오른쪽에 하나조노 도로(花園通り)가 나타난다.  하나조노 도로(花園通り)을 따라서 가면  왼쪽에 옛날 유곽 지구인 요시와라의 입구에서 새롭게 세운 출입문이 나온다.  그안에 들어가면 요시와라 신사가 보인다.  그 신사에는 아사쿠사 7복신중의 하나이며 지금은 연애를 이루게 하는 신인 베자이텐(弁財天)이 있다.  거기에서 요시와라 대문으로 향하고 좁은 길을 복쪽으로 간다.  양쪽에 유흥업 소를 많이 본다.  여기는 400년간 같은 유흥업계의 거리이다.

에도 시대에 요시와라 뒤편에 피차별민 중에 가장 낮은 신분인 비인들이 살고 있었다.  에도 비인() 두목 네명중의 한명인 구루마 젠시치(車善七)저택도 있었다. 비인들은 생산이나 판매에 종사하면 안 되었다.  그 사람들의 정식적인 일은 구걸이었다. 에도 시내와 운하, 강을 청소하거나 길에서 사망한 자를 처리했다. 불교에서 기부를 의미하는 간진(勧進)을 한 달에 한번 정도 모았다. 더욱이 에도 시내에서 낡은 종이를 모으고 씻어서 휴지 도매점에 팔았다. 그 외에는 무보수로 에도 관청(町奉行所)이 명령한 일을 하고 있었다.  감옥을 청소하거나 죄수를 돌보거나 처형을 돕고 사체를 처리했다. 처형장은 고즈카빠라(小塚原)이고 지금의 미나미센주2가이다.  그런 공무는 같은 피차별민인 에타와 같이 했는데 에타는 비인보다 높은 신분으로 자기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 비인을 감독하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지방 농촌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에도로 모였다. 무숙인(無宿人)이란 사람이다. 에도막부 말기에 증가해 갔다. 무숙인을 잡는 것이 비인의 새로운 일이 되었다.  무숙인 중에서 구루마 젠시치의 지배하인 비인이 된 자도 있었다. 구루마 젠시치(車善七)저택에서 가까운 장소에 아사쿠사 타메(溜)라는 수용소를 만들었다. 미결수 환자나 무숙인이 들어갔다. 비인이 그들을 돌봤다. 그러나  구루마 젠시치 저택도 아사쿠사 타메도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상상할 수 가 없다.  에도막부 말기에 구루마 젠시치 의 지배하의 비인 수는 약 4000명이다. 무숙인 수는 모른다.

4.요시와라 대문(吉原大門)

옛날 요시와라로 들어갈 문은 대문 밖에 없었다.  대문 앞에 산야보리(山谷堀)라는 운하가 있어서 스미다 강(隅田川)에서 작은 배로 대문에 다니고 있었단다.  지금 산야보리는 사라져서 넓은 도로가 되었다.

5.도테 도로(土手通り)

요시와라 대문 앞의 넓은 도로는 도테 도로(土手通り)라고 한다.  산야보리에 있던 제방인 니혼 츠츠미(日本堤)가 도로의 유래이다.  니혼 츠츠미(日本堤)는 옛날 자주 스미다 강이 낮은 토지인 미나미센주 부근에 넘친 적이 많아서 아사쿠사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만든 제방이다.  요시와라 대문 정류소에서 노선버스를 탄다.  스미다 강가를 달린다.

【日本語訳】

3.吉原神社

池波正太郎文庫から言問い通りを東へ少し歩くと、国際通りが現れる。そこを北へ曲がって少し歩くと、右側に花園通りが現れる。花園通りに沿って行くと左側に昔遊郭地区の吉原の入口の新しい門が現れる。その中へ入っていくと吉原神社が見える。その神社には浅草7福神の一つであり、今は恋愛を叶える神の弁財天がある。そこから吉原大門へ向かって狭い道を北へ行く。両側に風俗業の所をたくさん見る。ここは4百年間同じ風俗業界の街だ。

江戸時代に吉原の裏に被差別民の中で最も低い身分のが住んでいた。江戸頭目4人の中の1人である車善七の屋敷もあった。は生産や販売に従事してはならないとされた。彼らの正式な仕事は乞食だった。江戸市内と運河、川を掃除したり、道で死んだ者を処理したりした。仏教で寄付を意味する勧進を1か月に1回程度集めた。さらに江戸市内で古い紙を集めて洗い、チリ紙卸売り問屋に売った。その他には無報酬で町奉行所が命令した仕事をしていた。牢屋を掃除したり、囚人を世話したり、処刑を手伝ったり、死体を片づけたりした。処刑場は小塚原で、今の南千住2丁目だ。そんな公務は同じ被差別民のと一緒にしたけれど、はより高い身分だったので、自ら直接手を汚さずを監督する立場だった。

さらに地方の農村から逃げた人々が江戸へ集まった。無宿人だ。 江戸幕府末期にかけて増加していった。無宿人を捕まえるのがの新しい仕事になった。無宿人の中で車善七の支配下のになった者もいた。車善七の屋敷に近い場所に浅草溜という収容所を作った。未決囚の病人や無宿人が入った。が彼らを世話したのだ。しかし車善七の屋敷も浅草溜も残っていない。今想像することもできない。江戸幕府末期に車善七の支配下のの数が約4千人だったという。無宿人の数はわからない。

4.吉原大門

昔吉原に入る門は大門しかなかった。大門の前に山谷堀という運河があって、隅田川から小さい舟で大門へ通っていたそうだ。今山谷堀は消えて広い道路になっている。

5.土手通り

吉原大門の前の広い道路は土手通りという。山谷堀にあった堤防の日本堤が通りの由来だ。日本堤は昔よく隅田川が低い土地の南千住付近にあふれたので、浅草方向に流れないように作った堤防だ。吉原大門の停留所で路線バスに乗る。隅田川岸を走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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