随筆
文芸同と共に半世紀
歳月とはまさに流れる水の如し…
これが今の私の素直な気持ちである。
文芸同(在日本朝鮮文学芸術家同盟)結成65周年を祝い、2024年12月14日、ここ大阪の地でも記念公演「ハンマウム(一つの想い)」が行われ、私もその場で2編の詩を朗読させていただいた。
一編は、昨年3月朝鮮大学を卒業し母校の教壇に立った一番上の孫をうたった自作詩「こんな日が来るなんて…」、もう一編は、朝鮮の著名な詩人であるキム・サンオ詩人の詩「願い」を演劇口演部の仲間と共に合唱詩として朗誦した。
朗読を始めると急に胸がドキドキして勝手に涙が溢れてしまった。周りの人々は私がなぜ涙を流しているのかわからなかったはずだ。それもそのはず私自身がびっくりしたのだから… 孫娘の成長過程をうたいながら私は自身が歩んできた人生をふと思い起こしていたのかも知れない。
私が文芸同に加入したのは58年前の1967年だった。文芸同が何をするところなのかはよく知らなかったけど、高校卒業と同時に大阪朝鮮歌舞団で活動することになった私は、自動的に文芸同の盟員になった。その時まだ18歳だった私は、実に半世紀を超える長い歳月を文芸同と共に歩んできたことになる。
朝鮮の歌や踊りが大好きで小学生のころから舞踊部に属していたが、共和国創建20周年に際し5つの鉄筋校舎建設運動に立ち上がった大阪の同胞たちの姿を見ながら、ウリマル(自国の言葉)、ウリクル(自国の文字)をしっかり勉強して、同胞たちにもっともっと力強く呼びか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心の底から思った。
特別に文才があったわけではないけれど、時代の要求と受け止め、公演の台本を作り、二十歳になったとき、生れてはじめて詩も創った。同胞たちの民族愛、祖国愛、師弟愛を目の当たりにしながら書かずにはおれなかったと思う。
5年半に渉る歌舞団での生活、女性同盟本部で過ごした2年余り、文芸同大阪支部での7年間の専従生活…末息子が不治の病に侵され専従を辞めざるを得なかった1年間、その時も自分にできることはないかと居住支部を訪ねウリマル教室の講師として同胞たちと過ごした懐かしい日々…
1982年、夢のように中級部の作文講師として再出発し、次の年から30年余り朝鮮語の教師としての仕事をしつつ、文芸同文学教室に通い詩作と発表をつづけた日々…
1998年からは教員生活をつづけながらも文芸同大阪支部の委員長の重責を担い、同じ年、才能ある演劇家と巡り合うことによって文芸同支部に演劇口演部を新たに立ち上げ活動の幅を広げた。
2010年3月に定年退職の日を迎えるまで教員生活と文芸同活動の両立を続けたが、私は疲れを知らなかったし、むしろその日々があったからこそ幾度となく押し寄せてきた試練の峠を越えることができたと思っている。
定年退職後、自ら初級学校を訪ね放課後学童指導員の仕事を楽しんだ6年間、それと同時に日本の詩人たちと共に「朝鮮学校無償化除外を反対する」詩集を刊行し、仲間たちと共に広島を皮切りに奈良、京都、東京、東北、北海道、北陸まで足を延ばし、朗読会を開き朝鮮学校を守ろうと訴えた日々…
2012年からは大阪府庁前で行われた「火曜日行動」に毎週参加し、日本の有志たちと共に12年の間一度も欠席することなくフェイスブックで実況配信を続け、ブログを通して「火曜日行動」に参加されている同胞や日本の友人たちの姿を発信し続けてきた。
朝夕を問わず走り回り家庭の仕事をこまめにできなかったが、舅、姑、夫のお陰で、有難くも子どもたちはすくすく育ち、今日はウリハッキョの先生、民族学級の専任講師、音楽家に育ち元気に働いている。
文芸同結成65周年を記念する公演の最後に、1958年にキム・サンオ詩人が創作した詩「所願(ねがい)」を朗誦しながら私は改めて考えてみた。生涯私たちが願ってきたことは何であったのか、何のために文芸同活動を続けてきたのかを…
異国生活も80年近くなれば虚無感も無くはない。しかし諦めたその日が終わりであると常々思ってきた私は、これからもずっともがいていこうと思っている。
年ごとに増え続けるしわも人生の勲章と受け止め、若者たち、文芸同の仲間たちと人生の終わりの日まで詩を書き朝鮮語の朗読を楽しみながら生きていこうと決意を新たにしている。
수필
문예동과 더불어 반세기
세월이란 정녕 흐르는 물과 같이 빨리도 흐르는구나… 이것이 나의 숨김없는 오늘의 심정이다.
문예동결성 65돐을 축하하여 지난해 12월 14일 이곳 오사까에서 문예발표모임 《한마음》이 진행되여 나는 여기서 두편의 시를 읊었다.
하나는 올해 조선대학을 졸업하여 모교의 교단에 서게 된 큰손녀를 노래한 자작시 《이런날이 올줄이야…》, 다른 하나는 김상오의 시 《소원》을 연극구연부 맹원들과 함께 합창시로 읊었다.
랑송을 하기 시작하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나왔다. 아마 동포들은 내가 어째서 울먹거리는지 알지 못하였을것이다. 손녀의 성장과정을 노래하면서 나는 자신이 걸어온 한평생을 순간적으로 돌이켜보았는지 모른다.
내가 문예동에 가맹한것은 57년전인 1967년이였다. 문예동이 어떤 조직인지 잘 몰랐지만 고급부를 졸업하여 오사까조선가무단에 배치된 나는 자동적으로 문예동 맹원이 된것 같다. 그때 내 나이 18이였으니 실로 반세기가 넘도록 문예동조직과 함께 걸어온셈이다.
초급부시절로부터 무용부에 속하여 우리 노래, 우리 춤을 무척 좋아하던 나였지만 공화국창건 스무돐에 즈음하여 다섯개 철근교사건설운동에 떨쳐나선 동포생활현장을 돌아보면서 우리 말, 우리 글을 더 익혀 직접 동포들에게 호소하는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글재주가 특별히 있는것도 아니였지만 요구에 따라 공연대본을 만들고 스무살이 되던 해 난생처음으로 시도 짓게 되였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동포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펜을 쥐게 한것이리라.
5년 반의 가무단생활, 녀성동맹조직에서의 2년남짓한 생활, 문예활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고마운 배치로 1981년까지 계속된 문예동지부에서의 전임활동, 막내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 조직을 떠날수밖에 없었던 1년간, 그래도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성인학교 강사의 임무를 맡아 동포들과 함께 지낸 벅찬 나날…
1982년 꿈과 같이 중급부 글짓기강사의 임무를 맡게 되고 중급학교에서 30년남짓한 기간 국어교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빠짐없이 문예동문학부모임에 참가하여 창작발표활동
을 계속한 나날…
1998년부터는 교원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문예동 오사까지부의 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일하였고 같은 해에 재능있는 연극인을 만나 문예동지부에 연극구연부를 새로 무어 활동의 폭을 넓혔다.
2010년 3월에 정년퇴직의 날을 맞이할 때까지 교원생활과 문예동활동의 량립이 계속되였지만 나는 힘든줄을 몰랐고 오히려 그 나날들이 있어 몇번이나 닥쳐온 인생의 시련과 고비를 넘어올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년퇴직후는 스스로 초급학교를 찾아가 방과후학동지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일본정부의 탄압과 차별을 반대하여 오사까부 부청앞에서 시작된 《화요일행동》에 매주 참가하여 그 모습을 현장에서 페이스북으로 알리고 선량한 일본사람들과 힘합쳐 블로그를 통하여 12년동안 우리 학교를 지키자고 호소해왔다.
혼자서는 결코 넘어올수 없었던 산과 강들, 만약 문예동조직이 없었더라면, 우리 동포사회가 없었더라면 나의 오늘의 보람을 어찌 생각할수 있었으랴.
아침저녁으로 뛰여다니느라 가정일을 꼼꼼히 못하였지만 고맙게도 우리 아이들은 시부모님과 남편의 도움으로 오늘은 우리 학교 교원으로, 민족학급 강사로, 음악가로 자라 부지런히 활동하고있다.
문예동결성 65돐을 기념한 공연마지막에 1958년에 김상오시인이 지은 시 《소원》을 읊으면서 나는 다시한번 생각하였다. 한평생 우리가 바라던것이 무엇이였고, 무엇을 위하여 문예동활동을 벌려왔는가고…
이역살이도 80년이 가까와지니 허무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단념했을 때가 끝이라는것을 뼈저리게 느껴온 나는 계속 발버둥치자고 생각하고있다.
날이 갈수록 불어나는 하얀 머리도 주름도 인생의 훈장이라 여기고 젊은이들과 함께 문예동조직에서 인생의 끝까지 시를 짓고 우리 말 구연을 즐기면서 살아가자고 마음 먹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