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8/9호, 주간 아사히 154페이지로부터.
제1회 비틀즈와 시바(司馬)씨
1987(쇼와(昭和)62)년 3월말, 「아일랜드 기행」의 취재 때문에, 시바(司馬)씨는 런던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당히 아일랜드에는 건너가지 않는다. 케임브리지 대학등에서 강연을 하고, 영국에 1주일 정도 체류했다.
<영국이라고 하는 빛을 다소 느끼고나서, 그림자인 아일랜드에 들어가고 싶다>이라고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일랜드는, 예전에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압제와 빈곤 때문에, 많은 아일랜드인(아일랜드)이 바다를 건넌 역사를 가진다.
그위에, 예전에 런던의 거주자이었던 나쓰메 소세키를 그리워하고 있다.
소세키(漱石)는 1900(메이지(明治)33)년부터 약2년 영국에 유학하고, 자꾸만 하숙을 바꾸었다. 시바(司馬)씨는 그 최후의 하숙 부근을 방문하고, 「메이지(明治)의 슬픔」이라고 하는 장에, 메이지(明治)인 소세키(漱石)의 고뇌에 대해서 정을 품고 있다.
가장 시바(司馬)씨도, 런던에서의 숙소 「【오루도후호테루】」에는 고뇌하고 있었던 것 같다.
<메이지(明治) 말기에 할 수 있었던 이 호텔은, 1980년대의 기능 만능주의의 문명의 안에 있는 나등에 있어서, 다소의 망설이 있었다>
중략
그 후, 시바(司馬)씨는 철도로 리버풀을 향하고 있다.
<아일랜드인에 있어서 이 영국의 항구도시(港市)는, 일본의 엔카풍에 말하면 눈물의 항구라고 하는 것 이외에 없다> 17세기부터 노예무역으로 번성하고,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고, 산업 혁명으로 더욱 발전해 간다.
<동방의 대공업도시 맨체스터의 이른바 외항으로서 공업제품을 여기에서 실어 냈다> 일이 있으면 사람도 모여든다. 많은 아일랜드가 영국,혹은 미국에 이주할 때에도 상륙했다. 그대로 리버풀에 정착하는 것도 많았다고 한다.
<전시민의 약40퍼센트가 아일랜드라고 하는 거리다> 이 리버풀을 안내해 준 것은, 아베(阿部) 타쿠지이었다. 당시 이미 영국의 시민권을 잡고, 「【다쿠】」라고, 부르고 있었다.
<39나이이지만, 큰 눈이 맑아 있어서, 젊은이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땅에서 영국인의 부인을 받고, 이미 3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있다> 직업은 테라피스트에서, 공립의 정신과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상당히 태어나면서 상냥하고, 친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도, 끈기와 어학력이 필요한다> 시바(司馬)씨의 여행으로부터 26년후, 아베(阿部)씨에게 리버풀의 거리에서 만났다. 「당시의 나의 일은 ⊙워크 테라피라고 불리는 것이네요. 환자의 사회 복귀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환자에게 간단한 일을 시켜, 자신을 붙이게 해 간다.
단지 먹기 위해서 정신없이 겨우 도착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바(司馬)씨에게 저렇게 쓰게 해, 『나, 그런 좋은 것 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친척에게 상당히 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よ(웃음). 어학력, 사람에게 배우는 영어가 아니지만, 생활비를 벌이는 할 수 있는 영어로 한다」 1클래스에 57명도 있었던 베이비 붐 세대.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와사키시(川崎市)의 출신에서, 가와사키다이시(川崎大師)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홍백을 다 보면, 제야의 종이 들려오고, 첫참배를 했습니다. 가까운 대사다리를 자전거로 건너면, 바로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입니다. 그 시기JAL(일본 항공(日本航空))의 국제선의 주력기이었던 DC8을 자주(잘) 보러 말했다. 외국에 간 것은, 역시 동경한 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