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る牧師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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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在亨牧師のローマ書解説ーローマ書4章の読後

2024年06月24日 | キリスト教全般


은혜로운 로마서 강해집을 내신 장재형(장다윗) 목사님(왼쪽에서 두번째)과 올리벳대학교 졸업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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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옵니다.

 

“롬4: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4: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4: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장에는 ‘육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그의 강해집에서 이것은 바울의 독특한 언어인데, ‘외적’인 것을 말한다고 했다. 즉, 나의 외적인 모습, 나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나의 외적이고 표면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사는지 모른다. 나의 재능이나 외모, 나의 집안이나 재산, 나의 행위들이나 공적들, 성적과 점수들...이런 것에만 집중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행복해하거나 불행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이나 선행, 공적들, 율법을 지켰던 행위들, 할례같은 의식들...이런것들을 의지하면서 살았다. 이런 것이 외적인 것이다.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우리가 정말 집중해야 할 믿음의 세계에 대한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면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이면적인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보자. 예수님은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육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영에 초점을 맞추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아브라함은 육신으로는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었다. 자랑은 커녕 저주를 받기에 합당했다. 그는 우상장사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위나 문벌, 혈통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것이 어찌 하나님 앞에 자랑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장재형 목사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도 육신의 자랑으로, 행위의 자랑으로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총을 믿음으로 하나님에 선 것이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 그가 드러낸 믿음의 삶을 깊이 보고, 진정한 구원의 의미를 깨닫자.

아브라함의 전 생애에 대해서 쭉 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1장에 ‘데라’라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나고 창세기 25장 7절에 175세로 죽음을 맞이한다. 창세기 11장에서 25장까지 걸쳐서 그의 생애가 기록이 되어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이 아브라함이 갔던 믿음의 길을 따르는 자가 믿음의 후손인 것이다. 우리가 외적으로는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없지만 그가 갔던 믿음의 길을 온전히 따라 간다면 믿음의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후손이 될 수 없지만 이면적으로는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은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노아 이후 이 세상은 죄악이 만연했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10대 후손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의 나이가 75세였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조건적인 은총이며,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덮어 깨끗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세우시며 우리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열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란 참으로 끝이 없다. 이 사랑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응답했다.


1.아브라함이 갔던 믿음의 길 첫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던 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신다. 지금 있는 곳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종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떠나기는 하지만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목적지는 알려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붙잡을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창12: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가슴이 설레이는 말씀이신가. 이것은 놀라운 축복의 약속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하신, 우리를 향하신 끝이 없는 사랑이다. 죄악이 만연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그런 세상에, 축복의 근원이 될 조상을 세우시고 선의 역사를 새롭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와 자비이다. 아바 아버지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고 간 것아다. 죄인이지만 그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깨끗케 하시며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는 이 사랑, 영원한 죽음 속에서 살아야 할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를 그 죽음에서 건지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그 자리를 옮기시는 그 사랑을 믿고 나아갔던 것이 아브라함의 첫번째 길이다. 그가 혈통이나 재산이나 육신의 대단한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게 아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를 향하신 주의 은총과 자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사랑을 믿었기에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창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12: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12: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서 갔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그는 하란이라는 땅에서 살고 있었는데, 가나안으로 가려면 유프라테스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

“창14:13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히브리’라는 말은 ‘강 건너편에서 왔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강 건너에서 온 사람이었다. 강을 건너 그는 세겜 땅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까? 아브라함의 표면적이고 인간적인 부분들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재산이 많다거나 지위가 높다거나 외모나 재능이 뛰어나다거나 혈통과 가문이 훌륭하다거나... 소위 금수저이기 때문에 그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들이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선택을 받은 것이라면, 이 시대의 이런 표면적인 조건들이 뛰어난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표면적이고 외적인 것을 보시지 않으신다.

“롬2: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재산이든 혈통이든 재능이든...하나님은 그런 것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그런게 필요하겠는가?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만큼은 홀로 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먼저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다.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낌없이 모든 것을 부어주시고 또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외적인 조건이 뛰어난 자들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은 오히려 가장 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먼저 세우셔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더욱 드러내신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을 바라볼 때, 표면적인 조건들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함부로 판단하면 안된다. 서로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그 관점이다. 그냥 나 자체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멈추지 못하시고, 그렇게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랑을 믿어야 한다. 자신이 세운 기준들로, 세상에서 흔히들 말하는 기준으로 스스로를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아들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기 원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살던 곳을 떠났다. 가족과 자신의 재산 모든 것을 가지고 국경을 건넌다는 것을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성적이고 지식적인 사고로는 기름진 땅이었던 하란을 떠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안전하고 확실한 길로 가려는 것이 매우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인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이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가다가는 강도를 만나거나 하는 위험을 만나 죽기 십상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곧바로 떠났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굳게 믿은 것이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지식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있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보통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인간적인 차원 안에서만 살아간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보라. 다른 인간적인 판단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갔다. 그렇게 그는 세겜에 도착했고, 터를 잡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믿음의 차원으로 사는 자는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한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예배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다. 85세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 하셨는데, 한명의 자식도 없는 것이다.

 

“창15: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2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창15:3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창15: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15: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5: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