ホウケイのクジラ釣り!(흥부의 성의 고래사냥)

ホウケイじゃないのにホウケイと呼ばれる!

한재(寒齋) 이목(李穆)

2022-12-16 01:48:32 | 한재(寒齋) 이목(李穆)(선비정신)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

 

茶仙(다선) 寒齋先生(한재선생)의 諱(휘)는 穆(목), 字(자)는

仲雍(중옹), 号(호)는 寒齋(한재) 諡号(시호)는 貞簡(정간)이다.

本(본)이 全州(전주) 李氏(이씨)로서 始祖(시조) 翰(한)의 十五 世(십오세)에 이르러 侍中公派 端信(시중공파 단신)과 璿源派 勇夫(선원파 용부)로 分派(분파)되어 始祖(시조) 翰(한)으로부터

二十七 世孫(이십칠세손)參議公 閏生(윤생)의 次男(차남)으로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서 태어나 八歲(팔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十四歲(십사세)에 점필재 金宗直(김종직)의 門下(문하)에서 남효은,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등과 같이 학문을 닦기 시작한 수재자 였다.

 

十九歲(십구세)되던 成宗(성종) 二十年(이십년)에 소과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을 하였다. 이 무렵 참판 金首孫(김수손)이 대사성으로 성균관에서 강론하면서 선생의 비범함을 알고 사위로 삼았다.

 

성종이 병석에 눕자 대비가 무당을 시켜 벽송정에서 음사를 벌리는 무당을 쫓아내고 제단을 부수어버리고 윤필상을 간괴라 상소하여 오히려 공주로 유배되었다.

 

二十四歲(이십사세) 땐 연경 중국에 유학하였다.

一千四百九十五年(일천사백구십오년)에는 왕을 우롱하였다고 노사신이 간하여 二十五歲(이십오세) 나이에 두 번째 유배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곧바로 풀려나기도 한 忠直(충직)하고 强直(강직)하며 不義(불의)에 굴하지 아니하는 학자이시다.

 

二十五歲(이십오세) 되던 연산 원년엔 드디어 大科(대과)에서 登庸人才策問(등용인재책문)에서 天道策(천도책)으로 답하여 壯元及第(장원급제)를 하였다.

 

茶仙(다선) 寒齋先生(한재선생)은 正六品(정육품)의 성균관 典籍(전적)과 宗學司誨(종학사회)를 제수 받았고 다음 해인二十六歲(이십육세)엔 進勇校尉(진용교위)로 영안남도 병마평사로 부임했다.

 

二十七歲(이십칠세)가 되던 해에 湖堂(호당)에서 賜暇讀書(사가독서)를 했다. 이해 六月에 아들도(世璋) 낳았다.

 

燕山君(연산군) 四年(사년) 戊午士禍(무오사화)에 김일손. 권오복과 함께 二十八歲(이십팔세)를 일기로 斬首(참수)되었다. 그 후 甲子士禍(갑자사화) 때 剖棺斬屍(부관참시)란 혹형을 당했다.

 

이후 中宗(중종)이 등극하자 선생은 억울한 죄명이 벗겨져 복직되고 가산도 환급 받았다.

明宗(명종) 七年(칠년)에 종이품인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를 증직 받았고 명종 十四年(십사년)에 공주공암 소재 충현서원(忠顯書院)에 배향됐다.

 

청음 金尙憲(김상헌)이 선생의 墓表文(묘표문)을 짓고, 계곡 張維(장유)는 墓誌銘(묘지명)을 지었다.

肅宗(숙종) 四十三年(사십삼년)에 資憲大夫(자헌대부), 吏曹判書兼弘文館 大提學(이조판서겸성균관대제학), 禮文官大提學(예문관대제학), 世子左賓客(세자좌빈객), 五衛都摠府(오위도충부) 都摠管(도충관)등 正二品의 관직을 추증 받았고 景宗(경종) 이년에 貞簡(정간)이라는 諡號(시호)가 내려졌다.

 

英祖(영조) 二年에 선생의 절개를 영원히 기리도록 不祧之典(부조지전)을 명받았다.

正祖(정조) 五年(오년)엔 全州(전주) 黃崗書院(황강서원)에도 배향되었다.

 

한편 선생께서는 학문을 하는 여가에 茶(차)를 嗜好品(기호품)으로 愛用(애용)했다.

茶(차)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장인 茶賦(다부)가 선생의 著書(저서) 李評事集(이평사집)에서 一千九百八十年代에 발견되어 茶界에서 先生의 茶賦를 再 照明하기 시작했다.

陳甲坤(진갑곤) 편 『한국문집총색인』을 보면, 茶仙(다선) 寒齋(한재) 이전까지는 茶(차)에 관련된글로 茶仙(다선) 寒齋(한재)의「다부」와 같이 짜임새 있고, 분량이 있는 것은 단 한편도 없다.

초의 선사 전까지 茶仙(다선) 寒齋(한재)의 「茶賦(다부)」가 사실상 唯一無二(유일무이)하다고 할 것이다.

 

茶仙(다선) 寒齋(한재)의「茶賦(다부)」는 내용의 獨創性(독창성)에 있어서도 中國(중국) 晉(진)나라杜毓(두육)의 荈賦(천부)라든지 唐(당)나라 顧況(고황)의「茶賦(다부)」宋(송)나라 吳淑(오숙)의「茶賦(다부)」와 비교 할 때 단연 그 오른편에 선다고 할 수 있다.

 

陸羽(육우)의「茶經(다경)」과 盧仝(노동)의 “七碗茶歌(칠완다가)”를 비롯한 中國(중국)의 여러 문헌을 빠짐없이 섭렵 참고 한듯하지만 표현상으로는 換骨 奪胎(환골탈퇴)에 가까운 기법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楚辭(초사)」의「橘頌(귤송)」한 대목을 이끌어 첫머리를 장식하는 등 여러 참고 문헌에서많은 문구들을 직접 간접으로 인용한 「동다송」과는 구별된다.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의 「茶賦(다부)」가 이와 같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만큼 茶道(다도) 茶史(다사)의 측면에서 그에 대한 조명이 반드시 뒤 따라야 한다.

1333자로 된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의 茶賦(다부)는 수십 가지에 이르는 茶(차)의 명칭. 생산지. 품질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차의 미묘한 미각이 주는 五功(오공) 六德(육덕) 七效能(칠효능)까지 설파한 장문의 시로서 茶界(차계)에서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의「茶賦(다부)」을 높이 評價(평가)하여 선생을 茶父(다부) 또는 茶仙(다선)이라 推仰(추앙)하고 해마다 寒齋祠堂(한재사당=貞簡祠(정간사))을 찾아 獻 茶禮(헌다례) 행사를 하고 있다.

 선생의 作品(작품)에는 茶賦(다부) 以外(이외)에도 賦(부). 時(시). 疏(소). 啓(계).策(책)解(해). 記(기). 頌(송)등 天才的인 名文作(명문작) 들이 있다.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76-1번지에 있으며 貞簡祠(정간사)에서 不祧之典(부조지전)으로 每年(매년) 七月(칠월) 二十六日(이십육일) 午前(오전)十一時(십일시)에 祭享(제향)을 올리고 있다. <참고 反浦精舍>

 

이목 ,李穆 (1471 ~ 1498)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이다. 조선초 개국공신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진 이백유(李伯由)의 현손이며, 부친은 참의 이윤생(李閏生)이고, 어머니는 홍맹부(洪孟阜)의 딸 로 1471년(성종 2)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에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1489년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이 무렵 참판 김수손(金首孫)이 대사성으로 성균관에서 강론하면서 그의 비범함을 보고 사위로 삼았다.


태학생으로 있던 1490년, 당시 성종이 몹쓸 병에 걸리자 대비가 무녀에게 명하여 성균관 벽송정(碧松亭)에 제단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게 하였다. 이에 이목이 동료들을 이끌고 가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고 무녀를 매질하여 내쫓자 대비가 크게 노하여 왕의 병환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고하였다.

 

왕이 거짓으로 노한 체 하면서 성균관에 명을 내려 당시 유생들의 성명을 모두 적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다른 유생들은 모두 견책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다투어 도망하였으나, 이목만은 피하지 않고 당당히 명단을 적어 들어갔다.

성종이 그 기개(氣槪)를 가상히 여기고, 대사성을 불러ꡒ그대가 능히 유생들을 거느리고 솔선수범하여 선비의 습성으로 정대함을 따르려 하니 내가 가히 서용할 만 하다.ꡓ하고 특별히 술을 하사하였다.


1492년(성종 23)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자 당시의 재상이었던 윤필상(尹弼商)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기 때문이라고 격렬히 탄핵하면서 상소를 올려 “윤필상을 삶아 죽여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입니다.ꡓ라고 하였다.

 

또 윤필상이 왕에게 대비의 뜻을 받들어 숭불(崇佛)할 것을 청하자 또다시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항소하였는데, 윤필상을 지목하여 ‘간귀(奸鬼)’라 칭하므로 성종이 크게 노하여 “네가 어찌 감히 내가 존경하는 대신을 귀신이라 하느냐?” 하고 묻자

그는 “그의 간사한 소행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니 귀신이라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대신을 능욕한 죄를 물어 그를 엄중하게 처벌하고자 하였으나, 대간과 신하들의 만류로 풀려났다.

 


1495년(연산군 1) 정희량 등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두 대비가 부처를 섬기는 일과 세조가 숭불(崇佛)한 일의 잘못을 지적하고 불사(佛事) 즉 이단(異端)을 멀리할 것을 청하다 공주에 유배당하였다.

그러나 곧 풀려나 그해 25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종학사회(宗學司澮)를 겸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안도 평사로 나갔다.

1497년에는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실록청 낭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윤필상과 유자광 등 훈구대신들이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 사초(史草)로 제출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방한 글’이라고 연산군에게 일러바침으로써 이미 죽은 김종직은 물론 그의 문인(門人) 대부분이 화를 당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목 또한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일손․권오복․허반․권경유 등과 함께 체포당하여 갖은 고문을 받은 후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는 형장에 나아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가(絶命歌)」를 짓고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당시 그가 지어 부른 절명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검은 까마귀 모이는 곳에 흰 갈매기야 가지마라
저 까마귀 성내어 너의 흰빛을 시새움하나니
맑은 강물에 깨끗이 씻은 몸이 저 더러운 피로 물들까 두렵도다
책을 덮어놓고 창문을 밀쳐 열고 보니
맑은 강물 위에 흰 갈매기가 더 노니는도다
우연히 침을 뱉고 보니 흰 갈매기 등에 묻어버렸네
흰 갈매기야 성내지 마라. 저 세상 사람이 더러워서 침을 뱉았노라

그후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관을 쪼개어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그의 집은 깎여 나가 평지가 되었다.


중종반정 후 1507년(중종 2) 신원이 회복되고 적몰되었던 가산도 환급 받았으며, 1552년(명종 7)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에 증직되었다.


1717년(숙종 43)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고, 1722년(경종 2)에는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726년(영조 2)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려 그의 절개를 영원히 기리도록 하였다.


인조 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묘표(墓表)를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ꡒ우리나라의 도(道)를 붙잡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 이러한 것이니 그것은 큰 뜻이다.ꡓ라고 하였다.


1571년(선조 24) 공주 공암서원(孔岩書院, 현 忠賢書院)에 제향되었고, 1781년(정조 5)에는 전주의 황강서원(黃岡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48년(헌종 14) 고향인 김포에 그의 위패를 봉안한 한재당(寒齋堂)이 건립되었다.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선조실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 영조실록, 문과방목, 국조인물고, 연기인물지, 공주시지, 김포시지, 충남의 서원․사우, 공주의 향교와 서원․사우, 공주의 지리지․읍지, 공주시지) 

 

 

성명(姓名)

 이목(李穆)

본관(本貫)

 전주(全州)

시대(時代)

1471(성종 2)∼1498(연산군 4)

자(字)

중옹(仲雍)

호(號)

한재(寒齋)

이력(履歷)

이목(李穆)  1471(성종 2)∼1498(연산군 4)

조선의 문신.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 시호는 貞簡(정간), 開國功臣(개국공신) 伯由(백유)의 후손, 閏生(윤생)의 아들. 金宗直(김종직)의 문인. 19세로 進士試(진사시)에 합격, 성균관 儒生(유생)이 되어 王大妃(왕대비)가 성균관에 淫祠(음사)를 설치하여 무당을 부르자 이를 쫓아냈으며, 한편 유생을 이끌고 尹弼商(윤필상)을 탄핵하다가 公州(공주)에 付處(부처)되었다.뒤에 풀려 나와 1495년(연산군 1) 增廣文科(증광문과)에 장원, 賜暇讀書(사가독서)를 했고, 典籍(전적)으로 宗學 司誨(종학사회)를 겸하고, 이어 永安道 評事(영안도평사)가 되었다.1498년(연산군 4) 戊午士禍(무오사화)에 尹弼商(윤필상)의 모함을 받고 金馹孫(김일손)·權五福(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甲子士禍(갑자사화:1504) 때 다시 剖棺斬屍(부관참시) 되었다가 뒤에 伸寃(신원), 이조 판서에 追贈(추증), 公州(공주)의 忠賢書院(충현서원)에 祭享(제향).

 

 

이 름 : 이목(李穆)   시중공派  

자료종류 : 현조약기   생몰 : 1471∼1498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 백유(伯由)의 현손이며 호조참의 윤생(閏生)의 아들이고 목사 수(?)의 동생이다. 점필재(컒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대왕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반궁(泮宮)의 벽송정(碧松亭)에 기도를 베풀었을 때 공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무녀를 곤장을 쳐서 쫓아내었는데 후에 성종대왕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성균관에 명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유생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나 공은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윤필상이 정승으로 있을 때 한발이 심하자 공이 유생을 이끌고 윤필상을 탄핵하다가 공주로 귀양갔다. 이로부터 바른 말을 잘한다는 소문으로 명성을 더욱 떨쳤다. 뒤에 풀려나와 1495년(연산군 1)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전적(典籍)으로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고 이어 영안도평사(永安道評事)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형장에 나갈 때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의 노래를 짓고 죽으니, 그 때 28세였다. 윤필상은 그래도 원한이 풀리지 않자 갑자사화 때 공을 다시 부관참시하였다. 공이 죽을 때 1세 되던 아들 세장(世璋)은 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공은 뒤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공이 공주에 귀양갔던 인연으로 공주 인사들이 충현서원(忠賢書院)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저서에 <이평사집(李評事集)>이 있다.

 

 

이목(李穆) 字는 仲雍 호(號) 한재(寒齋) 본관은 全州

李評事集(奎4748), 李穆(朝鮮)著.

          2卷 1冊(87張) 木板本 30.7×20cm.

          四周雙邊 半郭:20×15.4cm.

          有界 10行 17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李穆(1471∼1498)의 시문집으로 曾孫 久澄이 1632년(仁祖 10) 初刊本을 다시  보완해서 重刊했다. 寒齋 李穆의 字는 仲雍, 본관은 全州, 開國功臣 伯由의  후손.  金宗直의 門人. 19세로 進士試에 합격, 成均館 儒生이 되었으며 이 때 王大妃가  성균관에  淫祠를 설치하고 무당을 부르자 이를 쫏아냈다. 또한 儒生을 이끌고  尹弼商을  탄핵하다가 公州에 付處되었다. 뒤에 풀려 나와 1495년(燕山君 1) 增廣文科에 장원 賜暇讀書를  했다. 典籍으로 宗學司誨를 겸하고 이어 永安道評事가 되었다. 1498년 戊午史禍 때  尹弼商의 모함을 받고 金馹孫·權五福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甲子士禍 때  다시  剖棺斬屍 되었다가 뒤에 伸寃되어 吏曹判書에 追贈되고 公州의 忠賢書院에  祭享되었다.  諡號는 貞簡. {卷1}:賦 9수(弘文館賦幷序, 女戎賦, 虛室生白賦幷序,  茶賦幷序,  七寶亭賞蓮辭등), 詩 40수(五言絶句 2, 七言絶句 10, 五言律 12, 七言律 9, 七言古風 7).  {卷2}:對策 3편, 記 1편(續唐明皇遊月宮記), 解 1편(象耕  島耘解),  祭文  1편(祭尹政丞壕文),  頌 1편(鳳鳴朝陽頌). 附錄으로 金馹孫의 感舊遊賦後序, 權五福의  贈李進士穆,  李仲의 挽舍兄重遭奇禍改폄, 柳子光傳, 戊午史禍事蹟, 戊午黨籍, 行狀,  補遺  등이  수록되어 있다. 1631년 李久澄이 쓴 跋文이 있다. 對策 3편 가운데 제1은 최근에 風雨가  不齊하고 水旱이 相仍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것이며 제2는  국가의 治亂興亡이 人事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天數에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를  논하라는 것이다. 제3은 人才는 국가의 利器로서 帝王의 致治에는 得人이 先務이라는 점에  비추어 네가지 人材에 관해 논하라는 것에 대해 李穆의 답안이 모두 첨부되어  있다.  「戊午史禍事蹟」에는 戊午史禍의 顚末과 관련자들의 처벌내용 등이 들어  있다.  「戊午黨籍」에는 金宗直, 金馹孫, 權五福, 權景裕, 李穆, 許磐, 姜謙, 表沿沫, 洪瀚,  鄭汝昌, 茂豊副正摠, 姜景敍, 李守恭, 鄭希良, 鄭承祖, 李宗準, 崔부, 李원, 李胄, 金宏弼,  朴漢柱, 任熙載, 李繼孟, 姜渾 등의 人的事項, 학문 계통, 처형 종류 등이  수록되어  있다. 戊午史禍에 관계되는 측면자료들이 있다.

 

 

<국조 문과 방목>

이목(李穆)   

       연산군(燕山君)1년(1495년), 별시(別試) 갑과1(甲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71년, 신묘

  자(字)   중옹(仲雍)

  호(號)    

  본관(本貫)   전주(全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정간(貞簡)

>>> 가족사항

  부(父)   이윤생(李閏生)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손약(李孫若)

  증조부(曾祖父)   이속(李粟)

  외조부(外祖父)   홍맹부(洪孟阜)

  처부(妻父)   김수손(金首孫)

  형(兄)   이수(李<수0x675F>)

  자(子)   이세장(李世璋)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89(기유)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호당&(湖堂&), 평사&(評事&)

묘(墓)

 

부(父)

이윤생(李閏生)  부사과(副司果)

모(母)

남양홍씨(南陽洪氏)  직장(直長) 홍맹부(洪孟阜)의 女

형제(兄弟)

형(兄) 이수(李수)  참찬(參贊)

배(配)

예안김씨(禮安金氏)  대사성(大司成) 김수손(金首孫)의 女

김수손(金首孫)

자는 사윤(士允). 1456년(세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진(撰進)했으며,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국조 문과 방목>

김수손(金首孫)   

       세조(世祖)2년(1456년), 식년시(式年試) 정과4(丁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자윤(子允)

  호(號)    

  본관(本貫)   예안(禮安)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신(金新)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숙량(金淑良)

  증조부(曾祖父)   김로(金輅)

  외조부(外祖父)   최거(崔<거0x5458>)

  처부(妻父)   공기(孔<기0x59AC>)

  손(孫)   김반천(金半千)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병신1476(丙申1476)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형조/참판&(刑曹/參判&)

 

김수손(金首孫)   

       성종(成宗)7년(1476년), 중시(重試) 3(3)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미상(未詳)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생부(生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병자1456식년시방$(丙子1456式年試榜$)

  전력(前歷)   행경력(行經歷)

  품계(品階)    

  관직(官職)    

자(子)

이세장(李世璋)  관찰사(觀察使)

1497(연산군 3)∼1562(명종17)

조선의 문신. 자는 도성(道盛), 호는 금강(錦江)·漁첤(어수), 評事(평사) 穆(목)의 아들. 1516년(중종11) 進士(진사)가 되고, 1534년(중종29)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正字(정자)·持平(지평)·校理(교리)·掌令(장령) 등을 지냈다.1541년 큰 흉년이 들자 지방관들의 구제사업을 督察(독찰)하기 위해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갔고, 이듬해 執義(집의)·副應敎(부응교)·侍講官(시강관)·典翰(전한) 등을 역임, 1545년(명종 1) 舍人(사인)에서 直提學(직제학)에 승진, 「中宗實錄(중종실록)」 編修官(편수관)을 겸했다. 1549년 同副承旨(동부승지)를 거쳐 右承旨(우승지)가 되고, 이후 禮曹 參議(예조참의)·都承旨(도승지)·戶曹 參議(호조참의)를 거쳐 1552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1544년 黃州 牧使(황주목사)로 좌천되었으나 兩司(양사)의 상소로 다시 호조 참의가 되었으며, 1557년 호분위 대호군에 보직되었다. 명종 때 淸白吏(청백리)에 錄選(녹선)되었다. 

 

<국조 문과 방목>

이세장(李世璋) More Info.

       중종(中宗)29년(1534년), 식년시(式年試) 병과4(丙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97년, 정사

  자(字)   도성(道盛)

  호(號)   금강(錦江)

  본관(本貫)   전주(全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청백리(淸白吏)

>>> 가족사항

  부(父)   이목(李穆)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윤생(李潤生)

  증조부(曾祖父)   이손약(李孫若)

  외조부(外祖父)   김수손(金首孫)

  처부(妻父)   양공숙(梁公淑)

  자(子)   이철(李鐵)

  손(孫)   이윤호(李允濠)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16(병자)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지신사$(知申事$), 옥당&(玉堂&)

녀(女)

 

형제(兄弟)

제(弟) 이진(李진)

문헌(文獻)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목(李穆)

#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선조신사건 인조을축액(宣祖辛巳建 仁祖乙丑額).

제향. 주 자(호회암 시문휘국공 문묘배향). 이존오(호석탄 고려 우정언 본경주). 이 목(영안도평사 증이판 시정간 본전주). 성제원(호동주 보은현감 본창녕). 조 헌(호중봉 증영의정 시문열 문묘배향 본배천). 김장생(호사계 일천참봉 가선대부 시문원 문묘배향 본광산). 송준길(호동춘당 좌참찬 증영의정 시문정 문묘배향 본은진). 송시열(호우암 좌의정 시문정 효종묘 문묘배향 본은진),

祭享. 朱 子(號晦庵 諡文徽國公 文廟配享). 李存吾(號石灘 高麗 右正言 本慶州). 李 穆(永安道評事 贈吏判 諡貞簡 本全州). 成悌元(號東洲 報恩縣監 本昌寧). 趙 憲(號重峯 贈領議政 諡文烈 文廟配享 本白川). 金長生(號沙溪 逸薦參奉 嘉善大夫 諡文元 文廟配享 本光山). 宋浚吉(號同春堂 左參贊 贈領議政 諡文正 文廟配享 本恩津). 宋時烈(號尤庵 左議政 諡文正 孝宗廟 文廟配享 本恩津),

*별사(別祠)

효종경인건(孝宗庚寅建).

제향. 서 기(호고청 증지평 시문목 본이천).

祭享. 徐 起(號孤靑 贈持平 諡文穆 本利川).

문헌(文獻)

이평사집 ( 李評事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李評事集

판심제  李評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31年刊

권책  本集 2권촵附錄 합 1책

행자  10행 17자

규격  20×15.4(㎝)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748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8

 

 저자

성명  이목(李穆)

생년  1471년(성종 2)  몰년  1498년(연산군 4)

자  仲雍  호  寒齋

본관  전주(全州)  시호  貞簡

 

 가계도

조부(祖父) 이손약(李孫若)  고성군사(高城郡事)

부(父) 이윤생(李閏生)  부사과(副司果)

모(母) 남양홍씨(南陽洪氏)  직장(直長) 홍맹부(洪孟阜)의 女

형(兄) 이수(李수)  참찬(參贊)

본(本) 이목(李穆)

배(配) 김씨(金氏)  대사성(大司成) 김수손(金首孫)의 女

자(子) 이세장(李世璋)  관찰사(觀察使)

제(弟) 이진(李진)

 

기사전거 : 墓表陰記(金尙憲 撰) 및 萬姓大同譜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성종 2 1471 신묘 成化 7 1 태어나다.

성종 15 1484 갑진 成化 20 14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19 進士試에 합격하다.

~ ~ ~ ~ ~ ~ ~ 왕대비가 성균관에 淫祠를 설치하여 무당을 부르자 이를 쫓아내다.○ 闢佛疏를 올리고, 尹弼商을 탄핵한 일로 公州에 유배되다.

연산군 1 1495 을묘 弘治 8 25 겨울, 문과에 장원하다.

연산군 2 1496 병진 弘治 9 26 성균관 전적이 되어 宗學司誨를 겸하다. ○ 賜暇讀書하다.

~ ~ ~ ~ ~ ~ ~ 永安南道評事가 되다.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28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斬刑을 당하다.

연산군 10 1504 갑자 弘治 17 -  갑자사화로 剖棺斬屍되다.

중종 2 1507 정묘 正德 2 -  5월, 復官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  公州 忠賢書院에 享祀되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8 -  손자 李鐵이 茂松에서 문집을 초간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  증손 李久澄이 靑松에서 문집을 중간하다.

숙종 44 1718 무술 康熙 57 -  ‘貞簡’(不隱無屈曰貞 正直無邪曰簡)으로 贈諡되다.

-  -  1914 갑인 -  -  -  후손 李存洙가 문집을 증보하여 간행하다.

 

기사전거 : 墓表(金尙憲 撰), 成宗實錄, 燕山君日記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遺文은 무오사화로 인해 대부분 산실되었는데, 아들 李世璋이 남아 있던 시문을 수집촵편차하고 손자인 李鐵이 1585년 茂松宰로 부임하여 이를 간행하였다.《초간본》 현재 이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板木이 유실되고 傳本 또한 귀하게 되자 증손 李久澄이 다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墓表와 補遺를 添入하여 1책으로 精寫한 후, 이것을 靑松宰로 있던 1631년에 「李評事集」으로 題名하여 2권 1책의 목판으로 중간하였다.《중간본》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근래에는 후손 李存洙촵李膺浩 등이 중간본에 일부를 증보하여 「寒齋集」으로 改題하고, 1914년 4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중간하였다.《삼간본》 현재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성암고서 박물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는 原集 2권 1책이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631년 靑松에서 간행된 중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詩촵文촵附錄 합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권1에는 詩가 실려 있으며, 賦촵辭촵오언절구촵칠언절구촵오언율촵칠언율촵칠언고풍 등 시체별로 분류하여 편차하였다. 이 중 七言古風의 〈遊龍門釜潭巖歌〉에는 저자의 自註가 있으며, 〈贈別洪?國隨相公謁先陵咸昌一首〉는 중간시에 새로이 增補한 것이다.

권2에는 1495년 문과장원 시에 지은 殿策을 비롯하여 3편의 策問과 記촵解촵祭文촵頌이 각각 1편씩 실려 있다.

附錄에는 金馹孫의 〈感舊遊賦後序〉, 權五福의 贈詩, 李?의 挽詩에 이어 南袞이 지은 〈柳子光傳〉과 「睡軒集」에서 발췌한 〈戊午史禍事蹟〉촵〈戊午黨籍〉을 싣고, 金尙憲이 지은 〈墓表陰記〉와 〈補遺〉를 添錄하였다.

권미에는 1631년에 쓴 증손 李久澄의 跋이 실려 있다.

필자 : 李美實

기타(其他)

 



最新の画像もっと見る

コメントを投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