ホウケイのクジラ釣り!(흥부의 성의 고래사냥)

ホウケイじゃないのにホウケイと呼ばれる!

이목묘표(李穆墓表)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2022-12-16 02:28:09 | 한재(寒齋) 이목(李穆)(선비정신)
 
 
  이목묘표(李穆墓表)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 행 진용교위 영안남도병마평사(行進勇校尉永安南道兵馬評事) 이공 목(李公穆)의 묘(墓)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 행 진용교위 영안남도병파평사(行進勇校尉永安南道兵馬評事) 이공(李公) 묘표(墓表) 음기(陰記)

공(公)의 휘(諱)는 목(穆)이요, 자(字)는 중옹(仲雍)이니, 완산인(完山人)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 완성군(完城君) 백유(伯由)의 4세손(世孫)이다. 증조(曾祖) 휘 율(栗)은 군기시 정(軍器寺正)이요, 할아버지 휘 손약(孫若)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고성군사(高城郡事)였다. 고(考) 휘 윤생(閏生)은 부사과(副司果)로 이조 참의에 증직(贈職)되었고, - 9자 빠짐 - 비(妣)는 맹준(孟準)의 따님으로 성화(成化) 신묘년(성종 2, 1471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효우(孝友)가 있고 충직(忠直)하였으며, 활달(豁達)하고 대단한 절개(節槪)가 있었다. 나이 14세에 처음으로 학문에 뜻을 두어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는데, 밤으로 낮을 삼았으니 이때부터 학업이 크게 진취하여 성문(聲聞)이 날로 전파하였다. 홍치(弘治) 기유년(성종 20, 1489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그때에 마침 성종 대왕(成宗大王)이 질병이 있었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비밀리에 무녀(巫女)로 하여금 푸닥거리를 하게 하여, 성균관의 벽송정(碧松亭)에서 야제(野祭)를 지내게 하였다.

이에 공이 제창(提唱)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금하고, 더 나아가 그 무녀를 매질을 하였다. 무녀가 궁중에 하소연을 하니, 대비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질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상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성종이 거짓 노하여 성균관으로 하여금 그때의 유생(儒生)의 성명을 다 적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모든 유생들이 틀림없이 한번은 혼쭐이 나리라 생각하고 모두 도피하였으나 공만은 피하지를 않았다. 단자(單子)가 올라가자 성종께서 대사성에게 하교하기를, “그대가 유생들을 잘 교도(矯導)하여 선비들의 습성을 올바르게 하였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고는 특별히 상을 내렸다.


한번은 공이 가뭄으로 인하여 상소(上疏)하기를, “윤필상(尹弼商)을 삶아야만 비가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윤필상이 길에서 공을 만나 불러 세우고 이르기를, “그대가 꼭 이 늙은이의 고기를 먹고 싶은가?”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소”라고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윤필상이 은밀히 성종에게 권유하여 자전(慈殿)의 숭불(崇佛)하는 뜻을 청종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 또 유생들을 인솔하고 항소(抗疏)를 하여 윤필상을 간귀(奸鬼)로 지목하고 그 간사함을 극론(極論)하며 죽이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친히 귀자(鬼字)의 뜻을 묻자,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그 소행(所行)이 이러한데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귀신이라 하옵니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공의 민첩함에 탄복하였다. 임금이 장차 의금부에 내려 공을 벌하려 하였으나 수상(首相) 허종(許琮)이 힘써 구제하였기 때문에 공을 공주(公州)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 일로 인하여 공이 강직하다는 평판이 크게 돌았다.


을묘년(연산 원년, 1495년)에는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영안남도 평사(永安南道評事)가 되었다. 그때에 연산군(燕山君)의 정사(政事)가 문란하여 소인배(小人輩)들의 판이 되었다. 사람들이 공을 위태롭게 여겼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공은 과연 윤필상의 무함(誣陷)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화를 당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는 28세였다. 윤필상은 공에 대한 한(恨)을 그치지 않아서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육욕(戮辱)이 천양(天壤)에까지 미쳤다. 중종(中宗)께서 반정(反正)하자 공의 복관(復官)을 명하였고, 뒤에 아들이 귀하게 되어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관직도 겸대(兼帶)하게 되었다.


공은 집에서 거처할 때에는 신실(信實)하고 화락(和樂)하였으나 일의 시비(是非)에 대해 논할 때에는 선악(善惡)을 변별(辨別)하여 강개(慷慨)하고 매우 정직하여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우리의 도(道)인 유학(儒學)을 부식(扶植)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소임(所任)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 기절(氣節)과 풍도(風度)를 한 시대에서 모두 우러러보았으나 간인(奸人)들은 이미 눈을 흘기고 틈을 엿보았으니, 마침내 공이 화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묘소(墓所)는 통진(通津) 상포(霜浦)의 여금산(餘金山)에 있으니 선산(先山)을 따라 간 것이다. 
공이 젊었을 때에 참판 김수손(金首孫)이 대사성이 되어 성균관에서 강론할 때에 공의 사람됨을 남다르게 보아 그 딸로 아내를 삼아주었다.

 

김 부인(金夫人)은 타고난 성품이 효우(孝友)가 있었고 막힘이 없이 통달(通達)하였다. 공이 비명(非命)에 가게 되었음을 애통하게 여겨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여러 차례가 되었다.

1남을 낳았으니 세장(世璋)으로, 공이 화를 당할 때에 나이가 겨우 1살이었다. 부인이 매우 사랑하기는 하였으나 올바르게 가르쳐서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현요직(顯要職)을 두루 거친 뒤 관찰사(觀察使)로 마감하였다. 세장은 청백(淸白)하고 근실(勤實)하기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부인의 봉작(封爵)도 이 아들이 귀하게 된 때문이었다.

부인은 40여 년간 영화(榮華)를 누리다가 가정(嘉靖) 무오년에 노환(老患)으로 집에서 사망하니, 향년(享年)이 81세였다. 묘소는 공주(公州) 서촌(西村) 부전(浮田)의 무성산(茂城山) 기슭에 있는 김씨(金氏)의 선영(先塋) 곁에 있다. 관찰사가 일찍이 공의 묘소를 옮겨 합장(合葬)하려고 하였으나 상중(喪中)에 병을 얻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관찰사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로 맏이는 병절교위(秉節校尉) 건(鍵)이요, 다음은 사과(司果) 란(鑾)이요, 다음은 수의부위(修義副尉) 기(錡)요, 다음은 문과(文科) 병조 정랑(兵曹正郎) 갱(鏗)이요, 다음은 문과 승지(承旨) 철(鐵)이며, 딸로 맏이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정수후(鄭守厚)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종실(宗室) 화릉 정(花陵正) 수혜(秀蕙)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현령(縣令) 구운한(具雲翰)에게 출가하였다.


아! 하늘이 뜻을 정하면 능히 사람을 이긴다고 한 것을 공에게서 더욱 징험(徵驗)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공을 화가 미치기 전에 보전하여 정론(正論)을 오래 가게 하고 사림(士林)에게 복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하늘이 정하지 않아서 그리된 것일까? 아니면 운수(運數) 소관(所管)이라서 하늘도 어찌할 수 없었단 말인가? 서운할 일이고 통탄할 일이로다.
 

천계(天啓) 5년(인조 3, 1625년) 5월 16일에 세우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 정(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김상헌(金尙憲)이 글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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