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ホウケイのクジラ釣り!(흥부의 성의 고래사냥)

ホウケイじゃないのにホウケイと呼ばれる!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 볼수없는 다시보는 송영길베트남 17세 미성년자 매춘 기사 (홍어법 위반 글)

2020-01-18 14:25:22 | 홍어법 위반 글

백석두 "송영길, 룸살롱 거쳐서..."

 

 

평화민주당 백석두 인천시장 후보는 28일 민주당 송영길 후보의 '대기업 스폰서 관계' 및 '베트남 성접대'의혹 등과 관련, 동행했던 이들의 실명과 증언자와의 구체적 대화내용까지 폭로했다.

앞서 18일과 25일 잇단 기자회견을 통해 송 후보 '베트남 성접대 의혹'을 제기한 바 있는 백 후보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파장이 예상된다.

백 후보는 이날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송 후보는 386초선의원 5명 (우상호 현민주당 대변인, 임종석 당시 열우당 대변인, 윤호중 박흥수 김영주 의원)과 함께 지난 2004년 8월15일 광복절 베트남 국회의장 초청이라면서 의원외교에 나섰으나, 베트남 의장 초청장도 없이 대기업 접대를 받고 로비에 나선 것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송영길, 17세 미성년접대부 매매춘…룸살롱 사장과 대사관이 나서 무마" 

백 후보는 "송 후보는 19일 호치민시 아마라 호텔내 룸살롱을 거쳐, 퍼스트호텔에서 17세 미성년자 접대부를 매춘, 성접대 받은 사실이 확인됐고 공안(우리나라 경찰) 단속에 적발됐다"면서 "대한민국 재선 국회의원이 베트남의 소녀관광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 후보 주장에 따르면, 룸살롱 사장과 대사관이 적극 나서서 사건은 무마가 됐다. 그는 "대사관이 사고친 국회의원 뒤처리 해주는 곳이냐"면서 "내용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어버린 386국회의원들은 국민을 위한 진정한 선량들인가"라고 따졌다.

백 후보는 또 '핵심자 증언록'을 통해 증언내용과 녹취록 사본(전문)을 일부 언론에 공개했다. 백 후보측에 따르면, 증언자는 2004년 8월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송 후보에게 미성년 여성접대부를 제공하고 사고가 일어나자 사후처리를 해준 당사자다.

백 후보측 권영 여성대변인은 향후 송 후보를 미성년자 매매춘 혐의를 고소하고, SKT커넥션 의혹에 대해 관계당국에 수사를 의뢰할 것을 밝혔다. 권 대변인은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럽다"면서 "2000년 5.18전야제의 임수경 생각이 나서 더욱 분통하다"고 말했다.

이에 현재까지 송 후보측은 "근거없는 루머에는 대응하지 않겠다"며 공식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다.

 

◇다음은 증언관계자 증언요지

0당신은 누구이며 어떻게 경영에 참여했나
-아마라호텔 가라오케(룸살롱)의 공동사장이다. 나는 한국에서 정상적인 사고와 상식적인 삶을 살아온 성공적인 사람이었다. 2000년에 베트남에 관광을 갔던 차에 친구의 권유로 참여하게 됐다.

16만불을 투자해 지분에 참여했고, 나는 한국에서만 있어도, 한동안 꾸준하게 매달 이익금이 들어왔다. 수금할 필요성이 있을 때만 호치민에 들어갔다. 베트남 투자는 내 인생의 유일한 패착이다. 나의 체질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0언제부터 직접 경영에 참여했나
-2003년 9월 17일 대대적인 단속에 걸렸다. 베트남 여성 21명이 걸렸고, 한국인 지배인이 3년형을 받아 구속되는 큰 사건이었다. 당시 양00사장이 공안에게 잘못보이는 등 경영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2008년까지 직접 운영하다시피했다.

0한국의 VIP들은 모두 그곳에 갔다는 게 사실인가?
-사실이다. 베트남 호치민에서 가장 크고, 아가씨만 130명이 넘는다. 지하는 춤추는 홀, 2.3층이 룸이었다.

0단속되면 어떤 경우에 처벌받는가?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업무시간인 오후7시부터 12시까지는 아가씨(접대부)와 (룸살롱을 나와)호텔에 가면 안된다. 쉽게말해 12시 이전에(아가씨와 함께)나가서 호텔에 간 뒤 적발되면 처벌받는다. 내가 경영을 맡은 이후에는 12시 이전에 절대 내보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02004년 8월 19일에 송영길 의원이 왔는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가?
-왔다. 이사람은 결과적으로 문제였다. 새벽에 느닷없이(공안들이 호텔에)들이닥쳤다. 나는 잠을 자다가 (소식을 듣고)깜짝 놀라 나갔다.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사건이었다

0아마라 호텔(9층까지 있음)이 아니었는가?
-아니었다. 아마라에서 술을 마시고(아가씨와 함께)나갔다. 퍼스트(제일)호텔이다.(유명한)아리랑 식당 옆이다.

0무엇이 문제였나?
-12시 이전에 (호텔에)들어갔다.

0왜 12시 이전에 들어갔는가?
-급하게(섹스)하고 싶으니까(일찍) 들어갔지!그걸 말해야 아는가?

0미성년자임을 왜 확인 안했는가?
-나는 접대부를 고용할때 꼭 신분증을 확인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신분증을 위조하거나 숨긴다. 숨겨버리면 17세부터 19세까지는 알 수가 없다.

0언제 들어갔는지, 미성년자와 들어갔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베트남은 5호담당제 국가다. 북한과 똑같은 사회주의 나라다. 금방 알아본다. 말이 필요없다.

0처벌받지 않았는가?
-(송영길)의 신분을 확인하더니 공안이 알아서 잘 풀어줬다. 그동안 대사관에서도 참견하고, 나도 내 업소에서 일어난 일이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공안이 잘 봐주고 해서 무사히 잘 풀렸다.

0미성년 여성에게 얼마나 심하게 요구했길래 문제를 일으켰는가?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본다. 아무튼 송영길은 문제가 됐다.

09월에 베트남에 왔을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나?
-그뒤에도 여러 번 왔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말할 것이 없다.

0아마라의 주고객중에 박연차회장이 유명한가?
-그렇다 박 회장이 가장 유명하다. 이 사람의 특징은…(녹취록 참조)

0송영길 사건때 박연차의 도움을 받았는가?
-양00는 한번도 나서지 않았다. 나와 대사관이 적극 나서 풀었다. 그리고 박회장이 힘이 돼줬다(처음에는 도움을 받았다는데 동의했으나, 뒤에는 도움 받은 바 없다고 번복함)그때 고생 엄청했다. 힘이 많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해야할 일이었다. 송영길은 나에게 형님,형님한다

아참,송영길 이 XX,이번에 인천시장인가 나왔지? 이게 될려나?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48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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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베트남 소녀 관광 증언자의 녹취록 공개

“그(송영길)는 세칭 도덕성 1등이라는 386이다”

 

김승근 /독립신문, bignews@bignews.co.kr

 

등록일: 2010-05-28 오후 4:15:00

 

 

 

평민당 백석두 인천시장 후보는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 인천시장 송영길 후보가 “베트남 소녀(아다라시)관광을 했다”고 주장했다. 

백 후보는 “깊고도 아픈 고뇌를 거듭했다”며 “민주당의 파당과 송영길 후보의 정치적 파멸까지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송 후보와 ‘386 초선의원’ 5명의 베트남 관광기(?)를 폭로했다. 

그는 “송영길 후보는 세칭 386 초선 의원 5명(우상호 현 민주당 대변인, 임종석 당시 열린우리당 대변인, 윤호중 의원, 박흥수 의원, 김영주 의원)과 함께 2004년 8월 15일 광복절에 베트남 국회의장 초청이라면서 의원외교 활동에 나섰다”며 “그러나 베트남 국회의장 초청장도 없고, 대기업 접대를 받고 로비에 나선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송영길 의원은 19일 호지민시 아마라 호텔내 룸살롱을 거쳐, 퍼스트 호텔에서 17세 미성년자 접대부를 매춘, 성접대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며 “공안(우리나라 경찰) 단속에 적발되었다”고 밝혔다.

백 후보는 “대한민국 재선 국회의원이 베트남의 소녀(아다라시)관광을 한 것”이라며 “그는 이 국제적인 성범죄에 한 올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은 채, 당당하게 인천시장 후보직에 나섰다. 그는 세칭 도덕성 1등이라는 386이다”라고 꼬집었다.

계속해서, “룸살롱 사장, 대사관이 적극 나서 무마되었다”며 “대사관이 사고친 국회의원 뒤처리 해주는 곳인가. 내용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어 버린 386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위한 진정한 선량들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민주당과 송영길 후보가 베트남에 이래도 되는 일인가? 민주당과 송영길 후보는 국제사회와 국민 앞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설 것인가?”라면서 “민주당은 해체해야 마땅하다”고 질타했다. 

이와함께 “송영길은 지난해 2월 노무현 대통령 일가를 향해 ‘성역없는 수사’를 촉구한 바 있다”며 “노무현의 자결에 자유스럽지 못하다. 그런 송영길이, 노무현의 자결을 촉구한 셈”이라고도 했다.

아울러, “민주당은 해체하고, 송영길 후보는 민주주의와 역사를 짓밟은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할 것”이라며 “모든 것이 사실로, 모든 의혹이 진실로 드러났다. 민주당과 송영길 후보는 해명해 보라. 허울좋은 민주당, 썩은 젓갈냄새가 진동하는 민주당 386 세력은 이제 국민들에게 심판받을 차례”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날 기자회견문을 언론에 배포한 백 후보는 ‘핵심증언녹취’를 각 방송사 등에 제공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송영길 후보의 도덕성 논란은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독립신문 김승근 기자(hemo@hanmail.net)
 
백석두 후보가 공개한 증언록 전문
<핵심자 증언록> 전문


■ 알려드립니다. 

1. 증언자는 2004년 8월 당시 베트남 호지민시에서 송영길 의원에게 미성년 여성접대부를 제공하고, 사고가 일어나자 사후처리를 해준 당사자입니다. 

2. 다음 내용은 증언자와 제 3인물 등의 인권과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익명으로 합니다. 

3. 다음 내용은 취재의 제 3자 보호와 취재의 편의를 위해, 내용의 실체적 진실이 변형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편집을 가했습니다.

4. 생경하고 자극적인 용어는 가급적 골라내었습니다.

5. 본 녹취록 사본(전문)은 YTN, 방송 3사, 오마이 뉴스 등 인터넷 방송국에 한해 제공할 예정입니다.


■ 증언 관계자 증언 요지 (녹취록 참조요망)


- 당신은 누구이며 어떻게 경영에 참여했나.

▲ 아마라호텔 가라오케(룸살롱)의 공동사장이다. 나는 한국에서 정상적인 사고와 상식적인 삶을 살아온 성공적인 사람이었다. 2000년에 베트남에 관광갔던 차에 친구의 권유로 참여하게 되었다. 16만불을 투자하여 지분에 참여했고, 나는 한국에서만 있어도, 한동안 꾸준하게 매달 이익금이 들어왔다. 수금할 필요성이 있을 때만 호지민에 들어갔다. 베트남 투자는 내 인생의 유일한 패착이다. 나의 체질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언제부터 직접 경영에 참여했나

▲ 2003년 9월 17일에 대대적인 단속에 걸렸다. 베트남 여성 21명이 걸렸고, 한국인 지배인이 3년형을 받아 구속되는 큰 사건이었다. 당시 양○○ 사장이 공안에게 잘 못 보이는 등 경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2008년까지 직접 운영하다 시피했다. 


-한국의 VIP들은 모두 그곳에 갔다는 게 사실인가?

▲사실이다. 베트남 호지민에서 가장 크고, 아가씨만 130명이 넘는다.

지하는 춤추는 홀, 2,3층이 룸이었다. 


-단속되면 어떤 경우에 처벌 받는가?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업무시간인 오후 7시부터 12시까지는 아가씨(접대부)와 (룸살롱을 나와) 호텔에 가면 안 된다. 쉽게 말해 12시 이전에 (아가씨와 함께) 나가서 호텔에 간뒤 적발되면, 처벌받는다. 내가 경영을 맡은 이후에는 12시 이전에 절대 내보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2004년 8월 19일에 송영길 의원이 왔는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가?

▲왔다. 이 사람은 결과적으로 문제였다. 새벽에 느닷없이 (공안들이 호텔에) 들이닥쳤다. 나는 잠을 자다가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나갔다.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사건이었다. 


-아마라 호텔(9층까지 있음)이 아니었는가?

▲아니었다. 아마라에서 술을 마시고 (아가씨와 함께) 나갔다. 퍼스트(제일)호텔이다. (유명한)아리랑 식당 옆이다.


-무엇이 문제였나?

▲12시 이전에 (호텔에) 들어갔다.


-왜 12시 이전에 들어갔는가?

▲ 급하게 (섹스)하고 싶으니까 (일찍) 들어갔지! 그걸 말해야 아는가?


-미성년자임을 왜 확인 안했는가?

▲ 나는 접대부를 고용할 때 꼭 신분증을 확인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신분증을 위조하거나, 숨긴다. 숨겨버리면 17세부터 19세까지는 알 수가 없다. 


- 언제 들어갔는지, 미성년자와 들어갔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베트남은 5호담당제 국가다. 북한과 똑같은 사회주의 나라다. 금방 알아 본다. 말이 필요 없다.


-처벌받지 않았는가?

▲ (송영길)의 신분을 확인하더니 공안이 알아서 잘 풀어 주었다. 그동안에 대사관에서도 참견하고, 나도 나의 업소에서 일어난 일이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공안이 잘 봐주고 해서 무사히 잘 풀렸다.


-미성년 여성에게 얼마나 심하게 요구 했길래 문제를 일으켰는가?

▲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본다. 아무튼 송영길은 문제가 되었다.


-9월에 베트남에 왔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나?

그 뒤에도 여러 번 왔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말할 것이 없다.

- 아마라의 주 고객 중에 박연차회장이 유명한가?

▲ 그렇다. 박연차회장이 가장 유명하다. 이 사람의 특징은 ...(차마 형용할 수 없어 각설함. 녹취록 참조) 


-송영길 사건때 박연차의 도움을 받았는가?

양○○는 한번도 나서지 않았다. 나와 대사관이 적극 나서 풀었다. 그리고 박연차 회장이 힘이 되주었다. (처음에는 도움을 받았다는데 동의했으나, 뒤에는 도움 받은 바 없다고 번복함)

그때 고생 엄청했다. 힘이 많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송영길은 나에게 형님, 형님 한다.

▲ 아참, 송영길 이 새끼, 이번에 인천시장인가 나왔지? 이게 될레나?

(보도자료 내용은 이만 줄입니다. 낮뜨거운 내용도 많고... 

녹취록 참조하시되, 제 3의 인물이나, 증인은 꼭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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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따라 들어가 봐도 기사들은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다.

∼◆홍어 선관위에 의해 이미 다 삭제 당했으니

 

 

홍홍상종(洪洪相從)의 원칙에 의한 판결!

피해자나 가해자가 ∼◆홍어냐 아니냐에 따라 판결 기준이 다르고

∼◆홍어들의 권익에 손,득을따져 판결 !

피해자가 ∼◆홍어일 경우:무조건 가해자 유죄!

가해자가 ∼◆홍어일 경우:무조건 무죄!

 

피해자,가해자 쌍방 ∼◆홍어일 경우 :

금전적 이득 또는 인맥에 가까울 수록 유,무죄 판결!

 

* 홍홍상종(洪洪相從) *
풀이 ; ∼◆홍어는 ∼◆홍어끼리 통한다.

 

 

더듬어 홍어당!

 

지나(支那)의 식인문화의 진실 (인용)★★★(19세 미만및노약자,임신부의 관람을 불가합니다)

2020-01-18 14:12:53 | 식인종 지나(支那食人文化)
지나(支那)의 식인문화의 진실 (인용)
 
  2008/04/29 오 전 8:45 | 퍼온 글

 

제 목    지나(支那)의 식인문화의 진실 (인용)
 

 

 

 

 



예전에 소위 ‘중국집’이라고 하는 중화요리집 음식 맛이 좋으면 그 집은 인육을 쓴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 적이 있었다. 현대문명의 시대에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지나(支那)인들은 인육을 먹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문화로 승화(?)시켰다. 흔히 지나(支那)문화라고 하면 찬란하고 호화로운 선진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 내면에는 식인풍습의 어두운 일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또는 원수에 대한 복수로서의 식인행위는 다른 나라, 문명권에도 많이 발생한다. 한 예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과 정기룡 장군은 왜군의 생간을 내어 씹어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나(支那)의 식인풍습은 그 시초가 이런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존재하며 또한 지나(支那)인들의 사고전반을 지배하는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나(支那)인을 이해하고 원만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식인풍습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정치사에 얽힌 지나(支那) 식인풍습의 사례


식인풍습은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식인의 기록은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등장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것이긴 하지만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를 배경으로 한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육장(肉醬)으로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의 이야기다.

 

사마천의 사기,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는 지나(支那)왕조사의 대표적 폭군인 은(殷)의 주(紂)왕 이야기다. 그는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 정숙해 자신의 성적인 취향에 맞지 않자 격노해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인육을 소금에 절인 육젓)로 만들어 먹어버린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 또한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린다. 

 

그 외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리는가 하면 (해, 포, 자는 이후 지나(支那) 춘추전국시대까지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 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하는 끔찍한 짓까지 저지른다. (후에 황비호는 격노해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된다)

 

 

 

 

비교적 잘 알려진 일화로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의 경우가 있다. 
공자는 ‘해(윗글에서 언급)’를 무척 즐겨 이것 없이는 식사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지나(支那)의 고전서인 예기, 동주열국지, 논어등에 언급) 그러나 그의 수제자 자로가 위
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된 후 그 시체가 잘게 토막나 해로 만들어져 공자 자신의 밥상에 올라온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이후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支那)는 고대 이전부터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법령들을 만들었다. 

이 법령에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위해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살육의 형’이 규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름아닌 ‘식인의 형’으로서 정식으로는 주나라 시기의 율령부터 등장하지만 전 왕조인 은나라 때에 이미 죄수의 살점을 도려내 다른 죄수에게 먹이는 형벌이 존재했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로서 식인형은 지나(支那)역사에 면면히 이어졌다. 

 

한고조 유방은 팽월을 죽인 후 간장에 절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 양제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신하를 삶은 뒤 그 국을 문무백관에게 내려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치통감 '당기'편에 보면 측천무후 집권시기에 탐관오리였던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는데 군중들(내준신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어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꺼기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명대의 명장 원숭환 장군은 청나라의 계략으로 처형당했는데 군중들이 몰려 와 그의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러 온 이들은 뼈밖에 수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

 

 


(2) 일상사에 얽힌 지나(支那) 식인풍습의 사례


당나라 시대 이후로 식인풍습은 더 이상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지나(支那)인 일상에 깊이 뿌리박힌 대중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이다.

지나(支那)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힌 대중적인 소설들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은 그들 특유의 식인풍습을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싸움에 지고 도망가는 유비에게 자신의 아내를 죽여 그 엉덩이살로 음식을 만들어 바친 자의 얘기,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도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포가 잡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이 먹었다는 얘기 등이 나온다. 

 

특히 수호지는 지나(支那)의 일상 식인풍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숨어 있다가 부자가 지나가면 뛰쳐나와 금품을 빼앗고 그 살은 고기로 먹고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데 씁니다. 

뚱뚱한 자는 쇠고기 대용으로, 마른 자는 만두소로 만들지요." 이것은 ‘한지홀률’의 별호를 가진 ‘주귀’란 자가 양산박 법도를 설명하는 부분에 나오는 것으로 소위 의적이라는 양산박 무리들은 사실은 사람을 죽여 재물을 빼앗고 그 고기를 먹는 극악무도한 악인들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송강의 아우인 ‘흑선풍’ 이규는 사람을 죽이고 난 후 그 인육을 먹곤 했는데 너무 많이 인육을 먹어서인지 눈알이 항상 붉게 충혈되었다고 한다. 무송이 유배가는 과정에서는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죽여 그 고기로 만두를 만들어 파는 끔찍한 주점이 나온다. (이런 곳을 ‘흑점’이라고 한다.)

 

‘동양이 서양보다 우수한 99가지 이유’ 라는 책에 이런 고사가 나온다.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살았는데, 때마침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곤 했다. 며느리는 시부모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는 말을 듣고, 놀라 친정으로 도망을 친다. 친정 아버지는 "누구 딸을 마음대로 잡아먹어!" 라고 분개했지만 후에 그 딸을 잡아먹은 건 친정 아버지였다.

 

 

과거 지나(支那)의 미식가(美食家)들은 식도락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해 즐겨 먹었다. 원나라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이나 송나라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사람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 있기까지 하다. 후대로 갈수록 맛으로 인육을 먹는 습관은 대다수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인육을 장에서 공공연히 사고 팔며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맛을 즐기게 되었다.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지나(支那) 식인풍습의 절정은 당나라 시기로, 당시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당나라는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했으며 끊임없는 귀족들의 특미(特味)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인육을 요리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는데, ‘철경록(輟耕錄)’에는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은 설진, 자기의 첩을 삶아 먹은 고찬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조야첨재’ 에도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나오는데 모두 이 무렵의 인물들이었다. 

 

당나라 시기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몰래 유통되다가 이때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 공개적으로 거래를 하게 되었다. (양주(楊州)와 봉상(鳳翔)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상설 인육시장이 있던 곳이다) 인육은 납치,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으며 또 중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곤 했는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아름다우면 기방 등으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 만큼 튼실하지도 못하면 인육이 되곤 했다.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로 보통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값을 폭락시킬 정도였다.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였다고 한다)

 

 

 

상설 인육시장은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 송나라 때의 항주(杭州)와 변경(?京), 명나라 때의 개봉(開封)과 중경(重京), 청나라 때의 안경(安京) 등에 개설되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말레이계 사람의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이러한 인육시장에서 판매하였고, 한족들은 이것을 보약(補藥)으로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육판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송나라때 금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지나(支那)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인육이 판매되곤 했는데 1919년에는 식량 부족이 심했던 러시아의 수도에서 지나(支那)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총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육은 어느 시대에나 싼 고기로 취급되었는데, 명나라 때 사천(四川)지방에서는 인육이 남자일 경우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에 거래되었다. 그러나 이 가격은 다른 고기들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는 것이었다. 1백여 년 전 청나라 때의 정치가 지나(支那)번의 일기에는 1860년 강소지방의 상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의 난 때 인플레가 심해서 130전까지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으며 1900년대 초 군벌시대에는 상육이 90전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지나(支那)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지나(支那)의 식인풍습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곤 했는데 지나(支那)문명의 찬미자로 불리는 마티니(Martin Martini : 1614~1661)의 견문록에도 이러한 식인풍습에 대한 목격담이 나타나 있다. 마르코 폴로 또한 ‘동방견문록’ 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노신은 그의 작품 ‘광인일기(狂人日記)’ 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정신병자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나(支那)에서의 실제상황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노신은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아Q정전(아Q正傳)’ 에서 다룬 노예근성과 함께 이 식인 풍습을 중국의 ‘2대악’으로 규정, 근절시키려고 노력했는데 당시 지나(支那)의 식인풍습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3) 지나(支那)의 식인풍습과 유교의 상관관계


지나(支那)의 유명한 사상가 노신(魯迅)은 식인 풍습과 연관지어 국가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했다. 그는 국가에 의해 구축된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우리 속에 갇힌 극빈한 군중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 자멸해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역설하면서유교의 원리가 바로 이러한 국가체계를 탄생, 유지시킨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지나(支那)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는 직설적으로 ‘유교의 사상이 식인풍습의 기반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으며 이후 지나(支那)공산당에서도 유교의 폐해 중 하나가 식인풍습을 조장한 것임을 밝혔다.

 

충효, 인의를 강조한다는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를 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不俱戴天)’ 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는데 그것을 효라고 본 것이다. 부모의 복수를 하는 자는 지원극통함을 푼다는 의미로 한 칼에 원수의 숨통을 끊지 않고 수천갈래로 난도질을 한 후 그 고기를 먹거나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기까지 했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이 흔했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들 뜻에 따라 ‘효자’로 표창을 받거나 혹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가기도 했다. 

 

‘충’을 보이기 위한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는데, 실례로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의 일화가 있다. 환공은 유명한 미식가였는데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였던 역아(易牙)는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죽여서 요리해 바침으로 환공에 대한 충성심을 보증 받는다. (역아는 후일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간신이 된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 자식을 잡아 자신의 주군에게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행위는 충으로 기려졌다.

 


(4) 지나(支那)의 식인풍습이 생겨나게 된 배경


지나(支那)의 식인풍습은 중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격한 권력투쟁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이 된 것,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잦은 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의 낙후로 인한 식량 부족의 극심함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적허용이 된 데다 잦은 기근과 전란의 영향이 겹쳐 식인풍습은 아무 저항감 없이 지나(支那)민중에게 뿌리박히게 되었다. 따라서 정쟁이나 전쟁에서 패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은 "잡아먹는 고기"가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자국민들까지 대량 징발해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식량’으로 사용한 것도 지나(支那)역사를 살펴보면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한 예로 당나라 말 혼란기의 처참함은 극을 이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군대행렬에는 인육을 가공하는 기계가 등장했는가 하면 국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의 군대가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모두 인육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식인현상은 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가 과밀된 지역에서 출현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의 대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지나(支那)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풍습의 전파는 족적이 서로 일치하는 비례관계가 있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지나(支那)문화의 전파에 따라 황하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일대로 파급되어진다. 그 경로는 지나(支那)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한다. 즉 사람들이 많이 이주한 지역은 과잉개발에 의한 자연환경의 파괴로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져 기근이 발생하며 이에 따라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부터 흥평 원년에 이르는 400년 동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지나(支那)문명의 시작인 황하일대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양자강)일대에서도 발생하고, 점차 강남, 광동, 복건성에까지 식인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지나(支那)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의 일이다.

 


(5) 식인풍습이 지나(支那)인들에게 미친 영향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지나(支那)의 식인문화가 수천년을 이어 면면히 지속되었고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면 지나(支那)의 역사와 문화를 논할 수가 없으며 지나(支那)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나(支那)인은 왜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를 믿지 않는지, 왜 돈을 그렇게 중시하는지, 왜 먹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미동조차 않는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왜 지나(支那)인은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 모여 사는지, 그 엄청난 인내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지나(支那)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 위주인지 (그래서 지나(支那)계 기업의 수명은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짧은 편이다.) 등등 모든 지나(支那)인의 일상문제를 살피고자 한다면 그 저변에 깔린 지나(支那)특유의 식인풍습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支那)인들의 서로에 대한 불신은 식인문화에 기인한다. 노신은 ‘지나(支那)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오랫동안의 식인풍습은 그의 말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의 그 자체를 없애 버렸다. 지나(支那)인들이 신의를 말할 때는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로 그때만 예나 도덕 따위의 단어가 나온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강자 앞에서는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 지나(支那)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 중 하나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식인 풍습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고대시대부터 식인이 형벌의 하나로 성문화 된 것, 막강한 황제권의 존재, 식인의 미화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직접적 원인은 식량부족에 있었다. 그 당시 식량의 개념은 곧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농업기술 발달 이후 식량자체는 그 가치가 하락되었고 그 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가치로 자리잡은 것이 바로 ‘돈’이었다. 식인풍습은 지나(支那)인들로 하여금 절박한 생존본능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 본능은 대대로 유전되었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더욱 강렬해져 생명과도 같은 ‘돈’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는 것이다.

 

전쟁, 기근등으로 식인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었다.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등으로 순서가 옮겨간다. 다음은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 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이 다음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단위 간에는 관청에 줄이 있어 면벌이 쉬운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는다.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다. 지나(支那)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결국 식인 풍습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 명이 뭉쳐서 숫자적 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다. 잡아먹히는 순서로 봤을 때 머릿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이다.

 

임어당은 삼대 뿐 아니라 외삼촌가족, 숙부가족, 고모가족등 거의 모든 구성원이 한 집에서 사는 지나(支那)의 대가족제도가 자연스럽게 지나(支那)인들의 인내력을 키웠다고 말했다. 식인풍습은 지나(支那) 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 큰 인내를 강요했다. 싫어도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는 처세 또한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의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스레 몸에 익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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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옹호하려는 친지나(支那) 쥐대가리들+친지나(支那) 홍어+조선족들의 댓글에 올려 놨던 댓 글

 

 

1990년대 중반경까지 일본에서 야키니쿠(불고기) 하면  일본인들은 무슨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물론 야키니쿠(불고기)는 제일교포들에 의해서 퍼진 한국요리인데  

한국에선 보통 불고기에 사용되어지는 고기라하면 일반적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두 종류지만 
일본에선 오키나와 지역을 제외한 육지쪽에선 대체로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요리종류가 돈카츠등 몇가지 외엔 그다지 많지않고 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중반경까지는 일본인들에게 야키니쿠에 사용되는 고기는 누구랄것 없이 소고기 란 대답이 나왔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실제 1990년 대 초 일본인들에게 물어 보고 들은 사실) 

지금은 한국 관광와서 돼지고기맛을 알게 된 일본 관광객들에 의해 돼지고기를를 찾는 일본인들도 많아진 편이다. 

고대 지나(支那:짱깨)의 해(醢)는 지나(支那:짱깨)인들에게 무슨 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러고 공자놈께서는 해(醢)를 무슨 고기로 알고 즐겨 쳐 먹었을까~요?? 



他被处以最残酷的醢刑。 그가 가장 잔인한 해형에 처해졌다. 
醢时古代的一种酷刑。 해(醢)는 고대 형벌의 일종이다.

 

-흥부의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