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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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軍「慰安婦」被害者キム・クンジャさん死亡…生存者は37人に」

2017年07月23日 | 日本軍隊性奴隷
http://japan.hani.co.kr/arti/politics/27999.html
「The Hankyoreh」 2017.07.23 23:02
■日本軍「慰安婦」被害者キム・クンジャさん死亡…生存者は37人に
  京畿道広州市のナヌムの家居住…老衰で死亡

【写真】故キム・クンジャさん=資料写真//ハンギョレ新聞社

 「慰安所で一日平均20人、多い日には40人まで日本兵を相手にする地獄のような生活をした。死ぬ前に日本の謝罪を受けなければとの思いで米国にまで行くことになった。私たちは今、お金を望んでいるわけではなく、彼らが犯した人権蹂躪と戦争犯罪行為に対して償わなければならない代価があることをを認識せよということだ」
 2007年2月、米国下院で開かれた日本軍「慰安婦」聴聞会に出席し「慰安婦」の惨状を証言した慰安婦被害者キム・クンジャさん(91)が23日午前8時4分、京畿道広州(クァンジュ)市のナヌムの家で老衰のため死亡した。文在寅(ムン・ジェイン)大統領はこの日、フェイスブックを通じて「2015年12月31日ナヌムの家でおばあさんを尋ねた時『被害者は私たち』とおっしゃったその姿を覚えています。強靭な生存者、勇敢な証言者だったキム・クンジャさん、すべての重荷を下ろして天で安らかにお休みください」と哀悼した。
 慰安婦被害が亡くなったのは今年に入ってから3人目だ。政府に登録された被害者239人のうち生存者は37人になった。
 キムさんは1926年江原道平昌(ピョンチャン)で生まれた。10代で両親と死別し、17歳の時に家政婦として祖国を離れ中国吉林省の琿春慰安所に連れていかれた。数回にわたり脱出を試みたがすべて失敗に終わった。抵抗して殴られ左の鼓膜が破れたキムさんは、生涯左耳が聞こえなかった。
 解放後に豆満江(トゥマンガン)を越えて帰国した。死ぬ思いで故郷に帰り、慰安所に連れていかれる前に結婚を約束した男性と再会したが、家族の反対でその男性は自ら命を絶ち、彼との間にできた娘は生後5カ月で亡くなった。その時から1998年にナヌムの家に来るまで一人で暮らした。

【写真】チョン・ヒョンベク女性家族部長官が今月10日午前、京畿道広州市退村面の日本軍「慰安婦」被害者の憩いの場であるナヌムの家を訪問し、キム・クンジャさんと挨拶を交わし手を握っている=光州/シン・ソヨン記者//ハンギョレ新聞社

 キムさんは、日本政府から公式謝罪と正当な賠償を受けることが願いだったとナヌムの家は明らかにした。故人は韓国政府から受け取った支援金に私費を加えて、「美しい財団」に1億ウォン、ナヌムの家に1000万ウォン、退村(トェチョン)聖堂に奨学金として1億5000万ウォンを寄付したことがある。2003年、政府が1965年の「韓日会談」の文書を公開しないと明らかにすると抗議の意思表示で国籍放棄申請を出しもした。
 葬儀室は京畿道城南市(ソンナムシ)盆唐区(プンダング)のチャ病院地下1階特室に整えられた。出棺は25日、埋葬地はナヌムの家追慕公園だ。カン・ギョンファ外交部長官、映画俳優ユ・ジテさんもこの日葬儀室を訪れ弔問した。

パク・スジ記者
韓国語原文入力:2017-07-23 20:3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3896.html


http://japanese.yonhapnews.co.kr/headline/2017/07/23/0200000000AJP20170723000500882.HTML
「聯合ニュース」2017/07/23 15:25
■慰安婦被害者が死去 生存者37人に=韓国
【広州聯合ニュース】旧日本軍の慰安婦被害者、金君子(キム・グンジャ)さんが23日、老衰のため、韓国人被害者が共同生活を送る施設「ナヌムの家」(京畿道広州市)で死去した。91歳。韓国政府に登録された慰安婦被害者239人のうち生存者は37人に減った。

【写真】今月10日、鄭鉉栢(チョン・ヒョンベク)女性家族部長官(右)が「ナヌムの家」を訪問した際、鄭氏と手を取り合う金君子さん(左)=(聯合ニュース)

 ナヌムの家によると、金さんは1926年に江原道・平昌で生まれ、10代初めに両親を亡くした。その後、親戚の家で生活していたが、1942年に中国吉林省・琿春の慰安所に連行され1945年に日本の植民地支配から解放されるまで苦難を強いられた。
 慰安所での3年間、7回も自殺を図った。何度も脱出を試みたが失敗し、そのたびに殴られた。暴行で鼓膜が破れた左耳は一生聞こえないままだった。
 金さんは2007年2月、米下院の公聴会で自らの経験を証言した。「(日本の植民地支配からの)解放後、38日間歩いて祖国に戻った。慰安所で1日に40人以上の相手をさせられ、死なない程度に殴られた」と語った。
 金さんは生前、 非営利公益財団やナヌムの家、カトリック団体などに2億5000万ウォン(約2500万円)を超える寄付を行った。日本政府からの正式な謝罪と正当な賠償を受けることを願っていた金さんは、賠償金も寄付する計画だったという。
 また、韓国の市民団体「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が慰安婦問題の解決を求め、毎週水曜日にソウルの日本大使館前で開催する「水曜集会」にも出席し、被害者の実情を訴えた。
         hjc@yna.co.kr


http://www.hankookilbo.com/v/4883f3a140864a8e8b80cb028d3022d9
「한국일보」2017.07.23 10:15  이범구기자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별세…생존자 이제 37명
 생존자 이제 37명

【写真】일본군 위안부피해자인 김군자 할머니. 한국일보자료사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보호시설인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김군자 할머니가 23일 오전 8시4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강원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서 생활하다가 16살의 나이로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몇 번의 탈출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때마다 구타를 당해 왼쪽 고막이 터져 할머니는 평생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3년간의 위안부 생활 동안 7차례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이 주최한 미국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며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998년 나눔의 집에 입소한 김 할머니는 매주 수요집회에 나가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받는 것을 소원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했다.
 할머니는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등을 모아 자기처럼 부모 없는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며 아름다운 재단에 1억원, 한 천주교 단체에 1억5,000만원 등을 기부한 바 있다.
 빈소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차병원 지하 1층 특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이며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031-768-0064)
 김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매일경제」2017.07.23 10:24:17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별세…생존자 이제 37명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가 23일 오전 8시 4분 나눔의 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다.
 나눔의 집에 따르면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서 생활하다가 17살의 나이로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강제동원됐다.
 할머니는 지난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이 주체한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며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증언했다.
 1998년 나눔의 집으로 오기까지 할머니는 혼자 살았다.
 할머니는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등을 모아 아름다운 재단에 1억원, 나눔의 집에 1000만원, 한 천주교 단체에 1억 5000만원 등을 기부한 바 있다.
 빈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차병원 지하 1층 특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이며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http://www.sedaily.com/NewsView/1OIL5MCRU7
「서울경제」2017-07-23 11:39:54   조교환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별세
 日 제대로 된 사과 받지 못한채 세상 떠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37명으로 줄어

【写真】미국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한인회가 지난 19일(현지시간) 클리프사이드파크 인근 트리니티 에피스코발 성당 앞 정원에 설치한 위안부 기림비.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할머니가 향년 89세의 나이로 23일 오전 8시 4분 별세했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따르면 김 할머니는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17살의 나이로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강제동원됐다. 강제동원 이후 생사를 건 탈출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김 할머니는 그때마다 구타를 당해 평생 왼쪽 귀가 들리지 않은 상태로 지내왔다. 3년간의 위안부 생활 동안 7차례나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할머니는 지난 2007년 2월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해방 후 38일을 걸어서 조국에 돌아왔다”며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증언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는 것이 소원이었던 할머니는 배상을 받으면 사회에 기부할 계획이었다.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등을 모아 아름다운 재단·나눔의 집과 천주교 단체 등에 2억 6,000여만 원을 기부한 바 있다.
 김 할머니의 빈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차병원 지하 1층 특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이며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한편, 김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23/2017072300509.html
「조선일보」2017.07.23 12:12   한상혁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별세…정부 등록 생존자 37명으로 줄어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89) 할머니가 23일 오전 8시 4분 나눔의 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강원도 평창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서 생활하다가 1942년 17살의 나이로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写真】김군자 할머니가 생전 경기 광주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쉼터인 '나눔의집'에서 말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해방 뒤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는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하루에 40여명을 상대로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이 주체한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끔찍했던 과거사를 증언했다.
 또 김 할머니는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 등을 고스란히 모았다가 자신처럼 부모 없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써달라며 2000년,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총 1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 퇴촌 성당에도 학생들 장학금으로 1억5000만원을 기부했다.
 김 할머니는 1998년부터 나눔의 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나눔의 집은 “김 할머니는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받는 것이 소원이었으며 배상을 받으면 사회에 기부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빈소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차병원 지하 1층 특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 오전이며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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