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

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と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

「言い切れなかった30分」

2016年04月12日 | 「朝鮮報国隊」
■言い切れなかった30分
                      安金花

 「私と息子は日本人のせいでこの場では言い切れない苦労をしてきました」。
 91歳の李康姫さんの最初の言葉でした。
 20代の若さで夫を亡くし、独り息子の母親として、そして大家族の長男の嫁としての役割を黙々と果たしてきた李康姫氏。今回高齢の彼女が周囲の心配にも関わらず息子さんの韓光洙と来日を決心したのは、日本人に向けこの一言でも言いたかったからだ、と言います。
 8月28日におこなわれた第5回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総会の席上、幸運にも未熟な私が約30分にわたる被害者親族李康姫さんのお話の通訳を担当させて頂きました。
 自分自身は、これまで通訳の役割とは内容を正確に伝えるだけで十分だと、「言われたままの正確さ」が何よりも大事であると思いました。
それは内容の多くが業務上の通訳だった為、仲介役としては絶対個人の感情を混じえてはいけないと判断したからです。
 しかし今回李康姫さんのお話からは知らないうちに何回も感情のコントロールをすることが難しくなり、上手く進められない特別な思いをしてきました。
 「父ちゃん」っていう言葉を口にする機会をなくした幼い息子を見守る母親の切なさ、そのような母親にはほんの少しの迷惑でも掛けてはいけないと思いつめた息子、夫、そしてお父さんの死に疑問を持ち続けてきたお二人の親子の絆を強く感じる時間でした。
 「彼らも自らの意思でやったわけではないでしょうが……」という一言、犯行を起こしたのも日本人ですが、今日その事実究明の中心役に携わっているのも、在日朝鮮人とともに正義感を持った日本の方であることが李康姫氏にとって一番の心の支えだと感じました。これからは「意思伝達の正確さ」は勿論お互いの心にも通じる第三者役としての通訳をしたいと思います。


【註記】
 2010年8月22日の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第4回総会・第6回定例研究会(主題:「朝鮮報国隊」の真相糾明)で、韓光洙さんに「アボヂは海南島から戻らなかった」と題する証言を、太平洋戦争被害者補償推進協議会の李煕子(イ ヒジャ)さんに「アボヂの魂を自由にするたたかい」と題する証言をしていただき、金靜美さんが「「朝鮮報国隊」と朝鮮自営隊について」と題する報告をしました(李煕子さんのたたかいについては、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会報』第2号〈2009年2月10日発行〉の「ヤスクニに閉じこめられているアボヂの魂を自由にするたたかい」をみてください)。
 海南島近現代史研究会第4回総会・第6回定例研究会の一年後、2011年8月28日の第5回総会・第8回研究会(主題:海南島における日本の侵略犯罪のいま)には、まもなく89歳になる李康姫さんが韓光洙さんといっしょに韓国から出席してくれました。この日、李康姫さんは、「夫は海南島につれていかれた」という題で、韓光洙さんは「アボヂの跡を追い続けて」という題で証言し、金靜美さんが「「朝鮮報国隊」の軌跡」について報告しました。李康姫さんの証言は、中国東北からの留学生である朝鮮族の安金花さんが通訳しました。
 「言い切れなかった30」は、そのときの思いを述べた安金花さんの文章です。

                                 佐藤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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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海南島‟朝鮮村”が証言する日帝の蛮行」

2016年04月02日 | 「朝鮮報国隊」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11734425&code=210000
『경향신문』 입력 : 2010.07.11 17:34:42 수정 : 2010.07.12 01:57:20
■[양국 시민활동가, 100년을 말하다](11) 중국 해남도 ‘조선촌’이 증언하는 일제의 만행
 형무소서 끌려가 노예처럼 일하다 학살 ‘한 맺힌 유골들’

 사토 쇼진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 회장

【写真】2008년 10월 ‘조선촌’ 조선인 희생자가 묻혀 있는 곳 인근에서 고속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뒤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작업사무소와 기숙사.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약 1000㎞ 떨어진 곳에 대만이 있다. 대만에서 서쪽으로 1000㎞ 정도 떨어진 곳에 해남도(海南島)가 있다. 해남도 남단, 중국 하이난성의 싼아(三亞)시 교외 여지구진(枝溝鎭)이란 곳에 ‘조선촌’(朝鮮村)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이 ‘조선촌’에는 지금 조선인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 1943년 봄부터 일본정부·일본해군·조선총독부는 조선 각지의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사람들을 선발해 ‘조선보국대’에 편입시킨 뒤 해남도로 강제연행하기 시작했다. 44년 말까지 ‘조선보국대’는 여덟 차례에 걸쳐 조직되고 약 2000명이 해남도에 강제연행됐다.
 비행장 건설, 철광석 채광 등이 중단된 뒤 ‘조선보국대’ 사람들은 싼아시 교외의 여지구진남정촌(枝溝鎭南丁村)과 그 주변에서 군용도로 건설공사를 하고, 군용 동굴을 파거나 다른 군용시설 건설 등에 동원됐다. 45년 8월 일본 패전 전후까지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병사들에 의해 살해됐다. 일본군이 없어지고 나서야 남정촌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해당한 조선인을 애도하며 ‘조선촌’이라고 개명했다. 지금 ‘조선촌’ 중앙 광장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묻혀 있다.
 
 일본기업은 일본점령하의 해남도에서 일본군과 함께 자원을 약탈하고 주민을 학대했으며, 조선이나 대만·중국 각지에서 연행해 온 사람들을 혹사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을 폭행사·사고사·병사·아사시켰다. 일본기업의 경제침략은 일본군의 군사침략과 결합됐다.
 1926년 이후, 조선에서 대규모 수력발전소나 비료공장, 유지(油脂)공장, 화학공장, 화약제조공장, 콩 조미료제조공장 등을 경영하고 자원과 노동력을 약탈했던 일본질소(日本窒素)는 40년 4월부터 해남도에 침입해 서부지역 석록(石碌)광산의 철광석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조선보국대’ 사람들은 일본군용비행장 건설, 항만 건설, 철도·철교 건설, 특공정격납용동굴(特攻艇格納用洞窟) 건설 등에 동원되고 석록광산이나 석원(石原)산업이 경영하는 전독(田獨)광산에서도 강제 노동했다. 전독광산에 세운 ‘전독만인갱사난광공(田獨萬人坑死難壙工)기념비’에는 ‘조선, 인도, 대만, 홍콩 및 해남도 각지에서 연행돼 온 노동자가 이곳에서 학대당하고 혹사당해서 죽임을 당함’이라고 새겨져 있다.
 일본내무성 문서, 조선총독부 문서, 구일본군 문서에 따르면, ‘조선보국대’에 편입된 후 해남도로 끌려 와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은 1000명(또는 그 이상) 정도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해남도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98년 6월 ‘기주(紀州)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조선촌’을 방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98년 7월에는 한국의 KBS(한국방송공사)가 ‘조선촌’에서 유골의 일부를 발굴했다.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2002년 4월17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2003년 5월5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선촌’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들의 사인(死因)을 규명하고, ‘조선촌’ 유골의 처우를 국가프로젝트로 생각해 달라고 요청했다.
 2004년 9월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일본정부(총리, 법무장관, 후생노동장관)에게 조선의 감옥에서 해남도로 연행된 조선인 전원의 명부를 포함한 조선보국대 관련 문서의 공개와 진상규명을 요청했다. 2004년 가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과 독립기념관에서는 ‘해남도에서 일본은 무엇을 했는가?-침략·학살·약탈·성노예화’ 특별전이 열렸다.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또 2005년 4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일제강점하의 해남도에서 조선인 강제동원·학살피해 진상규명을 공동으로 하자는 것과 이를 위해 ‘조선촌’ 발굴을 하자고 제안했다.

【写真】2001년 1월 ‘조선촌’에서 발굴된 조선인 유골. 머리에 큰 구멍이 나 있다.

 98년 6월부터 2006년 4월까지 30차례 정도 ‘조선촌’을 방문했던 ‘기주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더 이상 방치해 두면 안된다고 판단해 어쩔 수 없이 2006년 5월, 독자적이자 처음으로 ‘조선촌’ 유골 발굴을 위해 과학적인 시도를 했다. 이 시도는 매장양식, 매장상태, 유체상태, 유골, 유물상태, 유물내용 등의 해석·감정·분석에 있었으며, ‘조선촌’에서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밝히고, 공적 기관의 전면적 발굴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의 발굴은 중국 하이난성 정부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2008년 여름 ‘조선촌’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돼 한국인 유골이 묻혀 있는 장소 가까이에 있는 곳이 파헤치고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건설공사용 건물 등이 건설되어 유골의 일부가 땅 위에 그대로 드러났으며, 햇빛과 빗물에 노출되기도 했다.

【写真】2008년 10월 중국 해남도 정부의 ‘조선촌’ 횡단 고속도로 건설로 파헤쳐져 드러난 유골.

 ‘조선촌’에 매장된 조선인은 이제 유골이 되어 일본의 침략범죄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유골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에는 흙덩이와 함께 영원히 방기될 것이다.
 1939년 2월10일,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해남도에 일본군이 기습 상륙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대만 식민지화, 조선 식민지화, 만주 식민지화 당시와 마찬가지로 해남도 침략 때에도 일본정부의 점령지 확대를 기뻐하며 군사행동을 지지했다.
 일본정부·일본군·일본기업은 해남도에서도 민중을 학살하고, 집을 태우며 가축이나 물건, 경작지를 포함한 토지를 수탈했다. 광산자원, 수산자원, 삼림자원 등 각종 자원도 수탈했다. 자원 약탈·군용시설 건설(비행장, 항만, 도로, 철도) 등을 위해 해남도 민중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해남도의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다. 해남도의 자연을 파괴하고 일장기·기미가요·일본어를 해남도 민중에게 강요했다. 군표를 남발했으며, 아편재배도 시작했다. 일본군 문서와 일본기업 문서에 따르면 1939년 2월부터 45년 8월까지 6년 반 사이에 해남도에서 일본군·일본기업이 살해한 아시아 민중은 7만명을 넘는다.
 일본의 해남도 침략시대는 해남도 민중의 항일반일투쟁의 시대였다. 일본 민중이 해남도 침략을 왜 막지 못했는지, 조선식민지화를 왜 방지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지금 시오니스트의 팔레스타인 침략을 세계의 민중이 외면하고 있는 문제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일본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해남도에서 일본의 국가범죄를 총체적이고 상세히 밝혀냄과 동시에 아시아 민중의 항일·반일투쟁의 역사를 배우면서, 국민국가 형성기 이후의 일본국가의 침략 책임을 추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앞으로도 일본이 타 지역과 다른 나라를 침략함으로써 바뀐 정치·경제·사회·문화 구조를 바꿔나가는 운동을 계속해나가고 싶을 뿐이다.

★기주(紀州)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기주(紀州)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하 기진모)은 1989년 6월 미에현 기모토(三重縣 木本)에서 일제강점기에 학살당한 조선인 노동자(이기윤·배상도)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이 기초가 됐다. 97년 2월 설립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기진모는 98년부터 해남도에서 ‘조선보국대’의 진상규명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기진모는 2004년 9월15일 일본정부에 “조선보국대의 대원으로서 일본점령 하의 해남도에 송환되어 강제노동 당한 조선인 전원의 명부 소재 및 해남도로 끌려온 시기와 그 후의 소식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진모는 2004년 10월6일자로 후생노동성으로부터 “조선보국대에 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요청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는 회답을 받을 뿐이다. 이후에도 일본정부는 ‘조선촌 학살’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 ‘조선촌 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조선촌’에 묻혀있는 조선인 유골의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다. 기진모가 2006년 5월 독자적으로 시도한 발굴작업은 하이난성 정부에 의해 금지 당했으며, 민간인 조직의 ‘조선촌’ 유해발굴도 불가능하게 됐다. 한국 정부나 특정기관이 ‘조선촌’에 묻혀 있는 조선인의 유해를 발굴하지 않으면 일본정부는 조선보국대 학살의 사실을 끝까지 숨길 것이다. 기진모는 2007년 8월 창립된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와 함께 앞으로 현지조사와 구술청취 활동, 보고서 작성,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통해 해남도에서 일어난 일본의 침략범죄 사실을 밝혀나갈 계획이다.

★글쓴이 사토 쇼진은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미에현(三重縣) 기모토(木本)에서 학살당한 조선인노동자(이기윤·배상도)의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 미국항공모함에 반대하는 시민의 모임, 기주(紀州)탄광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869년 국민국가 일본이 식민지화해서 홋카이도(北海道)라고 이름 붙인 땅인 아이누 모시리에서 식민1세 아버지와 식민2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향신문 · 국치100년사업공동추진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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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政治犯集中営」

2014年04月07日 | 「朝鮮報国隊」
 中国社会科学院の「中国社会科学院中日歴史研究中心文庫」の一冊として 2013年8月付けで社会科学文献出版社から出版された何天義編著『日军侵华战俘营总论』に「朝鮮政治犯集中営」という小節があります(303~305頁)。そこには、つぎ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かなり事実と異なる非科学的な記述ですが、その一部を翻訳・紹介します)。
                                               佐藤正人


 「田独鉄砿の略奪を加速させるために、日本軍は中国各地から1万人以上の中国労工を連行しただけでなく、占領下の朝鮮の監獄から、減刑を口実にして、海南島に連行し、“朝鮮報国隊”と命名し、強度の苦役を強制した。
  後して「朝鮮犯人」数千名が三亜荔枝溝の三羅二村(現、三亜市田独鎮南丁三羅村)に設立された集中営に入れられた。
  かれらは、中国の労工と同じく、わずかなサツマイモ、とうもろこし、カボチャのスープを食べ、そまつなわらぶきの家に住み、竹の二段ベッドで眠り、麻袋やセメント袋を着た。
  戦争捕虜は毎日14時間働き、仕事を終わらなければ食事を与えられず、ひどく殴られた。殴られ殺された戦争捕虜は南丁村の北の丘に埋められた。
  1945年8月15日に日本天皇が無条件降伏を宣言したあと、海南崖県域内にいた日本軍は悲しみつつ投降の日を待っているとき、緊急に洞窟を掘り、武器や軍用物資を隠匿するという最後のあがきをおこなった。かれらは、1000人あまりの朝鮮政治犯を脅迫して南丁村付近の山麓に洞窟を掘らせ、物資を隠匿したあと、これらの朝鮮人を殺し、南丁村の丘の穴に埋めた。当事者の記憶によると、そこに埋められた1300人はすべて朝鮮人で、その後、そこは、“南丁千人坑”遺跡となっている。死難者を紀念して、当地の黎族群衆は、三羅二村を朝鮮村と改名した。
  ……………
  韓国KBSテレビは、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などの協力のもと、ドキュメンタリー《長埋在海南島的朝鮮魂》を放映し、三亜田独朝鮮村で発掘された朝鮮労工の遺骸について報道し、再び韓国を震動し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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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村」1998年6月~2012年11月 39

2013年02月24日 | 「朝鮮報国隊」
■2007年1月4日
 2006年12月28日から2007年1月25日までの4週間、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12回目の海南島「現地調査」をおこなった。
 そのとき、2007年1月4日に、「朝鮮村」を訪問した。2006年5月はじめの「試掘」のときから8か月が経っていた。
 「朝鮮村」をはじめて訪れたのは1998年6月だったが、それから8年半の間に、「朝鮮村」もその周辺もおおきく変わった。
 前年5月2日の「試掘」は、複雑な地権問題を現在の地権者の協力を得てのりこえ、日本政府の責任回避を許さず、韓国の真相糾明委員会の無為を放置せず、「埋葬地開発」の危機を事前に回避しようとして試みたものであったが、開始後すぐに三亜市外事部に妨害されて中断せざるを得なかった。
 その後、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全面的な「発掘」の前提としての「試掘」を再度おこなおうとして努力を重ねてたが、日本がこれまで隠しつづけてきた侵略犯罪を、わたしたちのような小さな民衆組織が、国家間の政治的諸関係の網をつきやぶって、発掘という手段で明らかにすることは、簡単ではなかった。
 2007年1月4日、「朝鮮村」のなかの朝鮮人の遺骨が埋められている広場には、風が吹き、牛が草を食べていた。8か月前、クイをうった跡も土を掘ったあともなくなっていた。
 「朝鮮村」は、急速に変わろうとしていた。
 このまま、放置しておけば、この地がとおくない時期に「開発」され、犠牲者の遺骨が土塊とともに放棄されてしまい、日本国家の侵略犯罪の証拠が消されてしまうことになると感じた。
 このブログの2007年1月4日の「「朝鮮村」で」をみてください。
                                         佐藤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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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村」1998年6月~2012年11月 38

2013年02月23日 | 「朝鮮報国隊」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1998年以降、海南島と韓国と日本で、継続的に、「南方派遣報国隊」=「朝鮮報国隊」にかんする「調査」をすすめていた。
 しかし、国家機関である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とは違い、民衆組織である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なしうる「調査」には、限界があった。
 韓国で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1998年8月から長期間、ソウルの韓国政府記録保存所で、「京城刑務所假出獄関係書類」を調査し、「南方派遣報国隊(朝鮮報国隊)」の「隊員」として海南島に送られ、帰郷できた人たちの「仮出獄書類」217人分を探しだした(韓国政府記録保存所は、その後、大田に移転し、韓国政府記録院となっている)。
 その後の数年間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朝鮮報国隊」の「隊員」として海南島に連行されながらも故郷にもどることができた人たちのうち、高福男さん、柳済敬さんら数人の方に会って話を聞かせていただくことができた。
 2006年3月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それまでに会うことができた人と本籍が北朝鮮にある人とを除き、126人について、韓国の本籍地管轄行政区の民願係に、協力を依頼する手紙を送った。
 126通のうち、2006年5月末までに、管轄行政区の民願係からなんらかの返信があったのは、30通であった。ひとつの行政区に複数の人がいるばあいもあったので、あわせて42人について民願係が返信してくれた。
 2006年7月に韓国に行き、返信をくれた管轄行政区の民願係の4か所を訪ね、さらに個別に調査を依頼した。
 その結果、残念ながら、ご存命の方はおられなかったが、遺族と会ったり電話で話すことができた。
 このブログの2007年5月28日の「海南島から生還できた「朝鮮報国隊」の人たちを尋ねて」をみて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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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村」1998年6月~2012年11月 37

2013年02月22日 | 「朝鮮報国隊」
■高麗博物館特別企画展
 「朝鮮村」での「試掘」を中断させられてから2か月半後の5月17日から7月16日まで、東京新宿大久保にある高麗博物館で、特別企画展「海南島で日本は何をしたか 戦時朝鮮人強制労働・虐殺 日本軍“慰安婦”」が開かれた。
 期間中、5月20日に佐藤正人が「紀州鉱山への朝鮮人強制連行と海南島での朝鮮人虐殺」と題して、5月2日の「朝鮮村試掘」にいたる過程と今後の展望を話した。また、5月26日、6月9日、6月23日にドキュメンタリー『日本が占領した海南島で 60年まえは昨日のこと』の上映会がおこなわれ、7月7日に前夜完成したばかりのドキュメンタリー『“朝鮮報国隊”』初版の試写会がおこなわれた。
 この展示にあたって、高麗博物館の山田貞夫氏は、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10回目の海南島「現地調査」に参加し、担当スタッフは学習を重ねて、くわしい解説パネルをつくった。6月に高麗博物館は、『海南島で日本は何をしたのか――戦時朝鮮人強制労働・虐殺 日本軍“慰安婦”――』を発行した。
 高麗博物館での特別展示の表題は、2005年9月17日から12月14日まで京都府の丹波マンガン記念館で開催された特別展示の表題と同じ「海南島で日本は何をしたか」であった。
 このことには大きな意味がある。展示の表題は、展示内容を凝縮して示すものである。
 大阪人権博物館は、2004年7月21日~8月15日に開催すると広報していた企画展「日本は海南島で何をしたのか――侵略・虐殺・略奪・性奴隷化」の表題を、開会2か月まえの5月13日に、「海南島とアジア太平洋戦争――占領下で何がおこったか」に変更することを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の求め、さらに、開会50日まえの5月30日に、企画展そのものを突然、一方的に延期していた。
 「高麗博物館特別展示“海南島で日本は何をしたか”」(三重県木本で虐殺された朝鮮人労働者(李基允・相度)の追悼碑を建立する会『会報』44号、2006年11月10日)、このブログの2009年5月9日の「国民国家日本の海南島侵略犯罪史認識と伝達」7、2012年7月19日の「「リバティの灯を消すな」について」、 2012年7月20日~21日の「企画展『海南島で日本は何をしたのか』無期延期の経緯と社会的応答」1~2をみてください。
                                            佐藤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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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村」1998年6月~2012年11月 36

2013年02月21日 | 「朝鮮報国隊」
■ドキュメンタリー『“朝鮮報国隊”』
 「朝鮮村」に埋められている朝鮮人犠牲者の遺体を「発掘」するということは、国民国家日本の侵略犯罪・他地域・他国侵略史を発掘することであり、それをおしすすめることは、国民国家日本の近現代史と全面的に対決することである。
 「試掘」は中断させられたが、わたしたちは、つぎの一歩をすすめた。
 「朝鮮村」での「試掘」を中断させられてから2か月後、2006年7月6日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ドキュメンタリー『“朝鮮報国隊”』の初版を完成させた。
 それは、1998年6月からすすめてきた「朝鮮報国隊」の軌跡追跡の経過を示し、「朝鮮村」での朝鮮人虐殺の事実を映像によって明らかにしようとするものであり、「朝鮮村」とその周辺に住む目撃者の証言・虐殺現場・強制労働現場(飛行場、鉱山、鉄道、鉄橋、軍用道路、軍用洞窟、特攻艇格納庫)、生還者の証言、旧日本兵の証言などを記録するとともに、2006年5月2日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試みた始めての科学的な犠牲者の「発掘」にいたる過程を報告するものであった。
 『“朝鮮報国隊”』の構成は、つぎのとおりであった。シナリオ全文は、このブログに2007年9月5日~9月18日に13回連載した「 ドキュメンタリー『“朝鮮報国隊”』をみてください。
  1-1、「朝鮮村」・「朝鮮報国隊」
  1-2、「朝鮮村」で朝鮮人が虐殺された
  1-3、なぜ「朝鮮村再発掘」が必要なのか
  2、現風景と証言① 回新村・三亜航空基地跡で
  3、現風景と証言② 陵城鎮・后石村・英州・新村で
  4-1、現風景と証言③ 感恩・八所で
  4-2、現風景と証言④ 石碌で
  5、現風景と旧日本兵の証言 中村・南林・六郷村・佐世保で
  6、韓国での証言、犠牲者の故郷の現風景
  7、韓国での証言 旧日本軍朝鮮人兵士
  8、海南島で日本軍隊性奴隷とされた朝鮮人女性
  9、「朝鮮村試掘」中断(2006年5月2日)
                                         佐藤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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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村」1998年6月~2012年11月 35

2013年02月20日 | 「朝鮮報国隊」
■「朝鮮村試掘」2
 2006年5月2日早朝、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考古学者、測量専門家の主体的協力を得て、「試掘」をはじめた。
 はじめに現場にレベルを固定し、測量し、「試掘」範囲を確定した。
 2メートル四方、二つのグリッド(「試掘」範囲)をとるようにクイを打った。
 水糸を張った…………。
 土を掘るまえに、グリッドの前にお菓子、果物、酒をならべ、犠牲者に、参加者全員が、それぞれの思いを込めて挨拶した。
 上層の草を取り除き、シャベルでグリッドを縁取りしていき、すくっていった。
 まもなく、三亜市外事部の官僚が警官隊とともにきて、作業の中止を求めた。
 「試掘」は中断せざるをえなくなった。
                                        佐藤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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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村」1998年6月~2012年11月 34

2013年02月19日 | 「朝鮮報国隊」
■「朝鮮村試掘」1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独自で、2006年5月2日に「朝鮮村」の遺骨のはじめての科学的な「発掘」を試みた。
 それは、①埋葬様式、②埋葬状態、③遺体状態、④遺骨、⑤遺物状態、⑥遺物内容などを解析・鑑定・分析することによって、「朝鮮村」における日本軍による朝鮮人虐殺にかかわる諸事実を明らかにし、公的機関による全面的「発掘」をうながすためであった。
 しかし、このときの「発掘」は、中国海南省政府によって中断させられた。
                                          佐藤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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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村」1998年6月~2012年11月 33

2013年02月18日 | 「朝鮮報国隊」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による「朝鮮村試掘」までの道程 24
 「朝鮮村試掘」を始める少し前、2006年4月20日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つぎのような呼びかけと報告をおこなった。

■2006年5月海南島「朝鮮村試掘」の目的■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2006年5月に「朝鮮村試掘」を行なうことにしました。参加を希望する方、あるいは日程を知りたい方は、会あてに連絡ください。
この文書の公開が遅くなったのは、韓国の真相糾明委員会からの最終連絡を待っていたからです。

★「試掘」規模:5平方メートル~7平方メートルを想定。
 ただし、地権問題などにより、こんかいの「試掘」が、最初で最後の科学的「発掘」となるおそれがあるため、条件があれば規模を拡大する。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だけで、「朝鮮村発掘」をやりとげることはできない。会だけで独自に「発掘」するとしても、それは「試掘」であって、わたしたちができるのは、本格的・全面的な「朝鮮村発掘」の前提作業だけである。

★目的:
1、「朝鮮村」における日本人による朝鮮人虐殺の事実を確かめる。
 1998年6月から2006年4月まで、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30回あまり、「朝鮮村」を訪問してきた。おおくの村人が、日本侵略時に、朝鮮人が「朝鮮村」とその周辺で日本人によって強制労働させられ、虐殺され、埋められたのを目撃したと証言している。
2、はじめての科学的な「発掘」をおこなう。
 2001年1月の韓国MBCらによる「発掘」によっても、朝鮮人が埋められていた事実ははっきりしたが、その「発掘」方法・記録は十分には科学的でなかった。今回は、全面的な科学的「発掘」の前提として、朝鮮人が埋葬されていると村びとが証言する広い地域のうちの僅かな部分を、慎重に考古学者の指導のもとに可能なかぎり科学的に「試掘」する。
3、死因を特定する。
 ①埋葬様式、②埋葬状態、③遺体状態、④遺骨、⑤遺物状態、⑥遺物内容などを解析・鑑定・分析し、できるかぎり死因を特定する。
 朝鮮人であるかどうかは、埋葬様式と埋葬状態の分析によってできるだけ明らかにする。
4、公的機関による全面的「発掘」をうながす。
 「朝鮮報国隊」に入れられていた朝鮮人が「朝鮮村」に埋められたという事実は、おおくの「朝鮮村」村びとの証言、および当時の日本人刑務官(衣笠一第7次「朝鮮報国隊」派遣中隊長、のちに部隊本部庶務主任)の証言によって明らかであるのだから、今回の「試掘」は、韓国政府と日本政府による全面的「発掘」→鑑定、犠牲者追悼、日本政府の引責・謝罪・責任者処罰の第1歩である。
5、「朝鮮村発掘」は、日本の侵略史の発掘、日本の侵略犯罪の発掘である。
 「朝鮮村発掘」が国民国家日本の侵略犯罪・他地域・他国侵略史の発掘である以上、それをおしすすめることは、国民国家日本の近現代史と全面的に対決することである。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日本政府(総理大臣、法務大臣、厚生労働大臣)に「“南方派遣朝鮮報国隊”の真相究明にかんする要請」をおこなったが、厚生労働省職業安定局総務課から「厚生労働省では“南方派遣朝鮮報告隊”に関する資料がないため、要請に対してお答え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南方派遣朝鮮報国隊」と書くべき個所が、「南方派遣朝鮮報告隊」となっていた)という「回答」があっただけである。

★附記 
 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2002年4月17日に金大中大統領に、2003年5月5日に盧武鉉大統領に、①「朝鮮村」に埋められている人たちの遺骨の死因を解明してほしい、②「朝鮮村」の遺骨の処遇を国家プロジェクトとして考えてもらいたい、と要請した。
 これにたいし、2003年11月12日付けで、韓国外交通商部長官から、
   「海南島をふくめ、海外に所在する日帝時代の韓国人犠牲者の遺骨奉還と関連して、外
   交通商部ではまず、日本、および太平洋各地を調査し、実態調査を実施した後、総合的
   な計画を樹立したあと、汎政府次元で推進するのが望ましいという立場です」
という公文書が送られてきた。
 2004年11月に、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が韓国国家機構として設置され、2005年2月1日から、強制動員被害真相調査申請と被害申請の受付開始した。
 2005年4月に、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に、日帝強占下の海南島における朝鮮人強制動員・虐殺被害真相糾明を共同でおこなうこと、そのために、「朝鮮村」発掘をおこなうことを提言した。
 この提言に、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は同意したが、それからこんにちまで1年間、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は、海南島での組織的調査も「朝鮮村」発掘の具体的準備もすすめてこなかった。
 ほんらい、海南島における日本の朝鮮人にたいする侵略犯罪は、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が職権で調査すべきであるが、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は、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の要請に応じて、2005年6月23日に、日帝強占下強制動員被害真相糾明委員会にたいし調査請求をおこなった。その請求は同年9月2日に受理されたが、請求内容にかかわる回答は、これまで届いていない。
 いつまでも放置しておくことができないため、やむをえず、こんかい紀州鉱山の真実を明らかにする会が独自で「試掘」せざるをえなくなったが、全面的な「発掘」は今後の課題である。ただし、地権問題が複雑化しており、こんかいの「試掘」後、埋葬地が「開発」=破壊されるおそれが生じ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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